……내가 환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쯤 일이었다. 몹시 북적거리는 대전(大田)의 버스공용터미널에서 전남 광주행(光州行) 버스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환희 스님이 한 마리 토끼처럼 톡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 환희 스님이에요. 환희 스님!”
“아니, 환희 스님이 여긴······.”
“아니, 그런다고 암 말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요?”
환희 스님이 곱게 눈을 흘기면서도 따지듯이 물었다. 그리고 우선 만났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강원은 어떻하구요?”
그녀는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의 대교반으로 학인이었다. 전국에서 모여 든 예비 비구니들은 이제 막 행자살이를 마친 1학년 치문반과 2학년 사집반, 능엄경을 배우는 3학년 사교반, 그리고 화엄경을 배우는 4학년 대교반으로 나뉘어져 공부를 하는 강원의 졸업반이었던 것이다. 그 4년의 교육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비구니계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기간 동안은 1년에 세 차례 있는 방학 외에는 엄격한 일정을 다 소화해 내야만 했다. 새벽 3시에 기상해서 예불, 입선, 강론으로 이어지는 강원 생활은 훈련소의 훈련병보다 더 엄격했다.
“실은 지금 방학이잖아요. 본사에 들려 은사 선생님께 인사드리려 가는 길이에요. 산문 밖에서 뵈니 더욱 반가워요. 차라도 한 잔 하는 게 어때요?”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러잖아도 두어 달 전 동학사에서 한 며칠 보내며 ⌜동학⌟이란 계간지 표지화를 그리고 있을 때 가장 내게 관심을 보였던 학인 스님이었다. 그녀는 ⌜동학⌟ 편집실 향설당에서 일하는 기자라는 신분으로 자유롭게 내 방을 들락거렸는데, 내게 인터뷰를 요구하기도 했고 때마침 불교신문에 크게 실린 동자승 그림을 보고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선생님의 작품이 불교신문 1면에 크게 났어요. 번뇌와 무명 소멸하는 천진불의 미소······.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서 그린 축화(祝畵)군요.”
“불교신문사에서 어찌나 한 점 보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참으로 귀엽고 천진난만한 동자승들이에요. 그런데 어쩌면 동자승들의 숫자가 저리 꼭 맞을까?”
동자승들은 모두 열 셋이었다. 그 동자승들은 연보라 빛 수수꽃다리 아래서 5월의 풍만한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는 동자승, 수수꽃다리 푸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는 동자승, 합장하며 환희를 만끽하는 동자승······. 모두 제각각 다른 몸짓을 하며 파릇파릇한 잔디밭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동자승들의 숫자가 맞다니요?”
“구도가 김홍도의 씨름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 그림을 네 등분한 다음, 네 귀퉁이에 있는 구경꾼과 한 가운데 선수를 합치면 각각 그 숫자가 똑 같아요. 그런데 동자승들 역시 수의 배열을 하셨더군요. 동자승 넷을 쌍 빗금 모양으로 배열해놓고 딱 한 동자승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 절묘하게도 그 숫자가 맞더군요.”
“우연의 일치였겠죠.”
나는 짐짓 심드렁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그녀의 안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학인 스님답지 않은 톡톡 튀는 목소리에 말할 수 없는 풋풋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직 미혼이시죠?”
그녀가 커피숍 의자에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그렇습니만······.”
나는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커피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나더니 당돌하리만큼 엉뚱한 말을 해왔다.
“그동안 저는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생각해보았어요.”
“무슨 말씀인지······.”
“동학사에서 선생님을 처음 보는 순간, 저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구요.”
운명이라니? 무슨 말을 하려고 운명이라는 말부터 꺼내는 것일까?
“그런데 선생님은 몹시 외로워 보여요. 왜 그러죠?”
커피숍 안은 한산했다. 창가에 앉은 두 남녀 뿐인 커피숍에서 그들은 뭐가 재밌는지 킥킥대며 열심히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어항 속 금붕어는 한가롭게 지느러미를 흔들며 수초 속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줄곧 선생님을 생각해 왔어요.”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앞에 놓아진 물을 급히 들이켰다. 그런데도 목이 몹시 탔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바랑을 풀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걸 한 번 봐보세요.”
그녀가 핸드폰 속에 든 사진 한 장을 확대해서 내게 내밀었다. 바다를 향해 꿈지럭 뻗어나간 산줄기의 코숭이에 그림처럼 서 있는 별장이었다. 그 별장 앞으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하얀 파도가 벼랑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웬 사진입니까?”
“부모님 별장이에요.”
“그걸 제게 왜?”
“그런데 선생님을 돕고 싶어요. 곁에서······.”
“그림은 혼자 하는 작업이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 아닌 걸요. 괘불처럼 큰 작품이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구요.”
그녀가 한숨을 폭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누군가가 도와드려야 할 분 같아요. 전 그걸 느꼈거든요.”
“생각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나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이러지 말고 우리 걸으면서 얘기해요.”
그녀가 먼저 일어나더니 커피 값을 계산했다. 뭔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뜻인 것 같아 잠자코 그녀를 따라갔다.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해 결국 허름한 선술집에 들어가 마주 앉게 되었는데,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되는지 곁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술집주인에게 막걸리를 시켰고 그녀는 음료수를 시켰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다 하십시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생각해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선생님을 만난 뒤로 늘 생각해 온 일이거든요.”
그녀는 한참동안 창 밖에 시선을 던지고 나서,
“아까 보여드린 별장 정도면 괜찮은 화실이 될 거예요.”
하고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냈다. 힘든 행자생활과 4년 가까운 강원 생활을 통해 비구니가 되겠다는 구도에의 길을 헌신짝처럼 버리겠다니. 나는 그녀의 말에 몹시 당혹스럽기만 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서도 퍽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제가 입산한 걸 몹시 반대하셨거든요.”
그녀의 눈 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이슬처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 차라리 그녀와 함께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불화를 안 그리면 어떻고 불모가 아니면 또 어쩌랴. 이 세상 뭇 청춘들이 그러해온 것처럼 아들 딸 놓고 그렇게 사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저는 잘 도와드릴 수 있어요.”
그녀는 거듭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이번엔 굵은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떨려오는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예비 비구니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말씀은 고맙지만 어차피 혼자서 걸어가야 할 길인걸요.”
“잘 알겠어요.”
그녀가 얼른 눈물을 훔치고 나더니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다시 말했다.
“훌륭한 화사가 되길 빌겠어요.”
“고맙습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거리는 휘황찬란했다.
“그럼······.”
그녀가 바랑 끈을 힘주어 오그리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렬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렇게 헤어진 환희 스님을 또 만나게 된 것은 남쪽 바닷가의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초봄이었다. 나는 작품을 끝내고나면 어디론가 쏘다니고 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버릇 때문에 캠핑카인 보리호를 몰고 한 점 구름이 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남도의 백련사(白蓮寺)에서 괘불을 작업 중이던 경운 화사로부터 보름 남짓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에 이어 탱화를 그려온 삼촌뻘의 경운(經雲) 화사로부터 나도 한 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일도 거들어 줄 겸 그 유명한 백련사 동백꽃을 실컷 보고 올 생각이었다. 어쩌면 경운 화사의 그 명경지수와도 같은 미소가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운 화사는 마음씨 하나는 도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서른여덟까지 교편생활을 하던 경운 화사에게 죽자 사자 쫓아다니는 여학생이 있었다. 여고 3학년 졸업반이었는데, 결국 학교에 사표를 쓰고 꽃처럼 예쁜 스무 살 연하의 여학생과 결혼해 신혼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남학생 하나가 찾아오더니 넙죽 큰절을 하고 나서 다짜고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경운 화사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학진학을 해야 할 학생이니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라고 권했다. 그런데 그 예쁜 연하의 새댁도 내팽개치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경운화사였다. 조각, 단청, 개금, 탱화를 잘했던 경운 화사는 1년 동안 한 차례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만큼 한 번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자연 새댁은 칠판에 분필가루를 날리며 가르치던 선생님의 환상이 와르르 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경운화사와 함께 백련사 괘불 작업을 순조롭게 끝내고 나서였다. 경운 화사의 안내로 절 아래 술집에서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술을 마셨다. 일을 끝냈다는 홀가분한 기분과, 모감모감 떨어지는 동백꽃의 모습이 더욱 술맛을 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카. 내가 겪은 얘길 해 줄테니 들어 봐. 합천 해인사에서 대웅전 단청작업을 할 때였지. 60여 명의 화공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자며 한 겨울 일을 했어. 추워서 불을 많이 때야 했는데, 한 두 사람만 제외하곤 그 많은 화공들이 다 감기에 걸리고 말았지. 그러나 하루도 안 빠지고 불사를 강행한 탓이었을까. 내가 가장 높은 4층 높이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 중간에 걸쳐놓은 나무 버팀목이 있어 밑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큰 못 두 개가 얼굴을 때리고 만 게야. 다른 화공들이 달려들어 나를 빼내 지대방으로 옮겼는데, 한 순간에 얼굴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지. 주지 스님이 찾아와 약을 사드릴테니 우선 몸부터 추스르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고 가더군.
그러나 운동신경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나는 불국사 내부단청을 할 때에도 또 추락하고 말았어. 발에 뭔가 걸리면서 몸이 뱅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아, 시방 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구나 생각하는 찰라, 털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누워있는 꼴이 되고 말았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더군. 그러나 나는 제발 그대로 나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 사람들이 나를 들것에 옮기는 순간, 극심한 통증과 함께 숨이 멎을 듯 정신이 아득해지더라구. 아, 사람은 죽을 때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결국 양 다리가 부러진 사건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었지.
제자들이 30여 명이나 병문안을 왔어. 단청불사를 하다가 두 차례나 추락한 뒤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치료를 하고 지내는 내게 제자들이 묻드구만. 선생님은 왜 사고나 당하시면서 이렇게 사시느냐구. 그러나 나는 당당하게 말했지. 지금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고. 또 붓만 잡으면 신들린 듯 몰입이 되면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고 아픈 기운도 어느 틈에 없어진다고.
퇴원한 후로 나는 어느 하루 빠진 날이 없이 잠자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천 번 부르고 지내는데, 이 또한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낙이 되고 있지. 두 번씩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도, 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도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었기 때문이 아니겠어?
한 번은 전주 서고사에서 한 달 동안 병 때문에 골골하면서 순전히 나물죽으로 연명하고 있었지. 그 때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셔서 입에 약을 넣어주었는데, 약이 뱃속으로 내려가는가 싶었을 때 꿈에서 번쩍 깨어나더라구. 그 때, 늙숙한 노인 한 사람이 서고사를 향해 들어오고 있더라구. 나를 바라본 노인이 ‘사람 꼴이 워째 그 모양인가?’ 하고 묻더니 방으로 들어와 맥을 짚어주더라구. 그 노인은 ‘아주 몹쓸 병에 걸렸어.’ 하더니 알 수 없는 약초를 송진과 함께 넣고 펄펄 끓여서 마시게 했는데, 그 후로 내 몸이 차근차근 좋아지더군.”
술기운 때문일까, 경운 화사는 말이 많아졌다. 그러나 모처럼 경운 화사가 살아온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였다.
“금어에게는 초화가 생명이야. 그래서 좋은 초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기 마련이지. 초가 좋아야 좋은 탱화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지. 그동안 전국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초를 얻기 위해 데상을 많이 해왔지. 사진을 찍거나 연필과 지우개를 이용해서 모사를 해왔는데 360여 장의 초화가 모아졌어.
그런데 어느 날 채권자가 초화를 가져가 버린 거야. 여러 화공들을 불러 모아 불사를 하다보면 빚도 지기 마련인데 빌린 돈을 갚지 못하니까 초를 가져가버린 것이지. 통사정을 해도 기어이 초를 가져갔는데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일이어서 불심이 깊은 김 처사란 분을 찾아갔지. 그 처사에게 돈을 얻어 기어이 초를 찾아온 적도 있었어.”
경운 화사는 말을 끊고 나서 핏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시뻘건 태양이 침몰하듯 서산 너머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항상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왔어.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세 분의 부처님이지.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었어. 세분의 부처님이 나타나시더니 ‘내가 시방 몹시 급한 일이 생겼다. 그러니 어서 나를 마당으로 내려다오’ 하고 말씀 하시는 것이었어. 그러나 무심코 하루를 넘겨버렸는데, 이튿날 밤에도 또다시 꿈에 나타나셔서 똑같이 말씀하시는 거야. 참으로 이상한 꿈이다 싶으면서도 일단 좌대 위에 모셔진 세 분의 부처님을 내려놓기로 작정하고 장정 네 사람을 불렀지. 그런데 마지막으로 약사여래 부처님을 마당에 마악 내려놓으려는 순간, 대들보가 우지끈 하고 부러지면서 지붕이 그만 내려앉았어. 참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온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지. 그래서 지금도 나는 중이 못된 것이 후회스러워. 고창 선운사 주지를 지낸 백운기 스님이 나를 예뻐해 주셨는데, 어느 날 내게 ‘경을 번역하는 동안에 특히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인간이 달에 가는 것, 원자탄 수소탄이 생긴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야. 부처님 시대에 그런 예측을 하실 정도니 그저 놀랍고 또 놀라운 일 아닌가’ 하시더군. 또 말씀하시기를 ‘물 한 방울에 균이 8만 4천이나 들어 있고, 땀구멍 하나에도 8만 4천의 균이 살고 있다. 그런 균이 있기에 인간이 살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부처님은 깨우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신 것이니 너도 딴 생각 말고 중이 되거라. 내가 계를 받을 때 은사 스님도 절에서 살아야 좋다고 하셨느니…’ 하시더군.”
경운 화사는 입산을 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아니, 젊은 여고생과 결혼한 일을 두고 후회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운 화사가 내게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술도 깰 겸 바람이나 쐬고 오자구. 저 산 너머에 여승들만 사는 옥련사(玉蓮寺)가 있거든. 그런데 그 절에 동백꽃보다 예쁜 비구니가 있지. 나도 먼발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과연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겼더라구.”
“얼마나 예쁜데요?”
“한 떨기 모란꽃보다 예쁘더라.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모르겠어.”
경운 화사가 빗장뼈가 빠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옥련사를 가기 위해 백련사에서 내려와 해안도로를 한참동안 걷다가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산길을 땀 한 번 빼며 끄덕끄덕 올라가자 옥련사가 제법 웅장한 요사채를 앞세우고 턱 버티고 있었는데, 때마침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저 아래로 질펀히 눕혀져 있는 핏빛 바다를 향해 잔잔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돌확 위로 떨어지는 우물가 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리에게 법당으로 향하던 비구니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서 물었다. 그 때 경운 화사가 옆구리를 툭툭 쳤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가 환희 스님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목소리만으로도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지랑이 꿈틀거리는 봄날, 이름 모를 언덕에 피어난 야생화 같기도 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산 속 옹달샘 같기도 하고, 찬 서리 내리는 가을 밤 보름달 같기도 하는 모습에서 뼈까지 울리는 듯한 목소리까지······. 분명 그 목소리는 천상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함께 예불을 하시지요.”
환희 스님은 미소 한 방울을 흘려보이고는 천천히 법당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법당에서는 산 숲의 온갖 새들이 모여 합창하는 것 같은, 텅 빈 겨울 들녘을 외로이 날아가는 철새들의 우짖는 소리 같은 염불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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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시임귀명례(至心歸命禮) 삼계에도사사생자아부(三界導師四生慈父) 시아본사아서어가모니이불(是我本寺釋迦牟尼佛)······.
지이시임귀명례(至心歸命禮) 시이방사암세제마앙찰해(十方三世帝網刹海) 상주일체에불타아야아중(常住一切佛陀耶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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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안으로 들어간 나는 생각대로 염불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이미 술기운은 온몸에 퍼진 터여서 아랫도리가 후둘 후둘 떨리면서 좌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예불문(禮佛文)이 끝나고 신중단(神衆壇)을 향해 반야심경이 시작될 때였다. 자꾸만 비틀거리는 몸을 꼿꼿이 세우려고 엉치등뼈에 힘을 주려는 순간, 그만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꽈당!”
정말 어이없게도 내 몸은 나자빠지면서 법당 문에 부딪쳤고, 한 마리 개구리처럼 허우적거렸다.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사미승들이 반야심경을 외우다말고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법당을 빠져나와 돌확에 고인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금방 어두워집니다. 조심해 가세요.”
어느 틈에 환희 스님이 곁에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미 경운 화사는 제 몸 가누기에 바빴는지 먼저 내려가 버린 후여서 혼자서라도 내려갈 요량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돌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한 바탕 공중재비를 할 뻔 했다. 그러자 내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간곡히 권유했다.
“안되겠어요. 여기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녀는 나를 객실로 안내하고 나서 이번엔 꿀물 한 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찾아왔다.
“자, 이걸 마시세요. 술이 좀 깰 거예요.”
“미안합니다.”
내가 더듬더듬 사과를 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뜻밖에도 유마거사(唯馬居士)의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중생이 아프므로 보살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씀을 조금은 알 것 같군요.”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은 이슬을 머금었고 목소리 또한 물걸레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중생이 아프므로 보살도 아프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일체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에 나의 병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일체중생의 병이 없게 되면 내 병도 나아질 것입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이렇게 유마거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 한 점 드리고 싶군요.”
그녀는 달라는 말도 그렇다고 거절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다. 나는 곁에 놓여져 있는 지필묵을 당겨 달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늘 그려보던 달마였지만 취기가 말끔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그려질 리가 만무했다. 먹이 번진 그림은 받지를 말고 술에 취해서 쓴 글씨 역시 받지를 말라는 해월 노화사의 가르침을 어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곱게 접어 손에 쥔 채로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새벽, 꿈결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그 염불소리는 이미 도량석(道場釋)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다시 잠에 깜박 빠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창호지문 틈으로 아침햇살이 적셔오고 있었다. 간밤 일이 떠올라서 도무지 얼굴을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방 안을 잠자리처럼 뱅뱅 돌다가 가만히 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경내를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아침 공양이나 들고 가시지요.”
등 뒤에서 정겨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환희 스님이 어제처럼 또 그렇게 서있었다.
“아닙니다. 그냥 가겠습니다.”
솔직히 그녀를 마주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나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라뇨?”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어떤 부탁을 해도 반드시 들어주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백꽃 그림 한 점 그려주세요.”
어젯밤 그려준 달마가 맘에 들자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이곳이 동백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었을까.
“왜 하필 그것을?”
“글쎄요.”
“알겠습니다. 그려드리지요.”
그러나 나는 그 뒤로 동백꽃을 그리지 못했다. 아무리 그려보려 해도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찢고 또 그렸다가 찢기를 반복했던 세월이었지만 언젠간 동박새가 찾아들 만큼 잘 그린 그림을 반드시 그리고 말겠다고 늘 되새기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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