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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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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기자의 '이태원 참사 현장을 가다'
"애들아 미안하다"

쌓여 있는 애도의 꽃송이들과 물품들 사이로 따닥따닥 붙여놓은 글자들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내가 이태원 참사 현장에 가보지 않았더라면 왜 우리가 그곳에서 죽은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하는 지 정말이지 깊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애도기간이 끝나는 날인 지난 5일 이태원 참사 현장을 찾아 갔다. ‘여기가 이런 곳이었구나.’ 그렇게 좁은 골목에서 156명이 죽고 200명이 넘는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발걸음이 쉬이 돌아서지지 않았다.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던 사고 골목인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은 156명이 줄을 지어 서 있어도 꽉 찰 듯 작은 골목인 것이다. 이렇게 작은 골목에서 그 밤에 156명이 압사해서 죽었다니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면으로 볼 때는 몰랐던 참사 골목의 현장은 너무도 좁아서 처참해 보였다. 골목 양쪽으로 두 명의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처럼 그때도 그렇게 지켜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아쉬움도 소용이 없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만 먹먹해왔다. 골목 안에는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당일 쓰레기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는데, 비둘기 두 마리가 골목 위 부분 즈음에 내려앉더니 이리저리 먹이를 조아대며 매우 평화롭게 거닐어 다녔다.

사고가 아니라 재앙이다. 재앙.!”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정말이지 하늘의 재앙이 내려진 것처럼 참사현장을 바라보니 무서움이 밀려왔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 한복판 골목에서 무참한 일이 발생해서 온 국민을 슬프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사 현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짓는 이유, 그 긴 숨에는 풀릴 수 없는 답답함이 묻어나왔다. 주변으로 애도의 꽃들과 애도의 메모지들이 빽빽이 붙어 있고 계속 고인의 명목을 비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붙여지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평안한 안식을 빕니다.”라는 짧은 애도의 글을 써서 붙였다. 그 옆에는 우는 아버지도 계시고, 흐느끼는 어머니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 있다. 죽은 영혼들을 잘 보내주려는 종교인들의 기도소리까지 이 모든 슬픔이 엉켜져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발길을 차마 돌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외국인들의 모습도 참 많았다. 지하철역에서부터 하얀 국화꽃을 든 청년이 울면서 걸어가는 것도 보았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산불과 홍수 그리고 태풍도 견디어 냈지만, 이토록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인가. 서울 한복판에서 홍수가 나서 지하방에 사는 사람들이 죽었고, 승용차들이 둥둥 떠다니기도 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안전해야 할 수도 서울에서 최근 들어 엄청난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수도 서울이 불안한 도시가 되고 있다는 점은 국가 전체가 위험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프니까 국민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이태원에 놀러가서 죽은 애들을 애도해야 하느냐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그렇게 말한다 해도 틀렸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왜 우리가 이태원 사고가 참사이고 사망자가 아니고 희생자인지 알게 된다. 우리가 놀이공원엘 가더라고 놀이기구가 안전할 것이라고 타는 것이다. 이태원 핼러원 축제가 열리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고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기 위한 장소를 간 것이다. 이미 그곳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예견했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들이 고장 나 있다면 그곳에 가질 않듯이 말이다. 국가가 핼러원 축제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일단 이해 안 되는 일이다. 인파가 많이 모이든 적게 모이든 핼러원 축제가 예견된 것이었다면 그만한 대책은 이미 있어야 했던 것이다.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노력하고 인내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조언처럼 청춘의 시기에는 성장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청춘에게는 갖가지 시련이 기다리고 있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을 믿으면서 말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어른들을 따라야 하는 청춘은 아픈 것인지 모른다. “얘들아 미안하다.”라는 애도의 글이 크게 보였던 것은 청춘의 나이 20대 꽃다운 청년들의 희생이 다수였다는 데 있었다. 어른들을 믿고 따라오는 나이 이다. 핼러원 축제를 즐기고픈 청춘의 나이인 것이다. 김난도 교수의 메시지처럼 청춘은 원래 누구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니 혼자만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뜻처럼 우리나라의 청춘들을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 할 시기이다. 이번 사태는 국가의 위정자들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안전불감증 속에서 벌어진 재앙인 것이고, 국민모두를 아프게 한 그러니까 국민은 아프니까 국민이다.’가 되었다. 예견된 핼러원 축제를 축제가 아닌 현상이라고 인식한 용산구청장의 발언에 놀라고, 행정안전부 장관의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는 발언에 놀랐다. 얼마 전에 행안부장관이 경찰 권력을 마치 뺏어가듯 이 해 벌어진 경찰사태도 있었듯이 권력이란 많이 가진다고 해서 좋은 일은 아닌 듯싶다. 행안부 장관이 장악해 버린 경찰의 공백이 여실히 들어나는 참사라고 생각된다. 장관이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할 필요성이 없다고 느끼고 있어서 일까. 경찰수뇌부들의 재난 대처도 초등학생 수준임에 또 놀라고 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은 미사일을 연일 발사하고 있어 북한과의 대립은 전쟁의 위기까지 낳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총을 들고 앞장설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의 아들들인 것이다. “엄마 전쟁나면 우리는 여기 없어요. 모두 전방에 가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 막내아들의 말이 참 아프다. 축제에 놀러가서 죽어야 하고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전방으로 나가야 하는 국가의 청춘들은 지금 너무 너무 아픈 것이다.

이태원 참사만큼이나 슬픈 이태원의 유래를 많은 사람들이 요즘 공유하고 있다. 한번도 이태원에 이런 슬픈 유래가 있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외국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곳이라서 이태원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 그 슬픈 이태원의 유래를 들어보자.

슬픈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시대의 '양대 칠푼이' 선조와 인조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 타버려 졸속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꼴이나, 한술 더 떠서 궤변으로 그를 합리화시키는 일부 학자 들이 있답니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 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 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립니다.( 가등청정 이 놈은 불국사도 불 질러 버린 사람이랍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 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 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 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워 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 그 바탕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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