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17
김현임(수필가)
여고금슬(如鼓琴瑟)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도, 여필종부(女必從夫)도, 남편의 죽음에 따라 죽지 못하고 남은 미망인(未亡人)이란 단어도, 칠거지악의 첫째 항목인 시어른들에게 순종치 않는 불순구고(不順舅姑)도 사어(死語)가 될 위기다. 최근엔 혼인신고 전에 재산권에 관한 계약을 확실히 매듭지어 두는 부부도 늘어났다고 한다. 예전엔 연예인이나 재벌가에서나 있음직한 사례가 재혼부부 뿐 아니라 초혼을 하는 젊은이들도 심심찮게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추세란다. 상대를 향한 사랑은 사랑이요, 내 돈은 끝까지 내 돈이라는 식이다. 세계적인 부동산 갑부인 도널드 드럼프도 ‘아무리 사랑해도 혼전 계약서는 반드시 써라’ 조언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재산을 노리고 부자노인을 유혹해 거액의 위자료를 챙기던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 케서린 제타존스는 실제로 자신보다 스물다섯 살 많은 부호(富豪) 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와 결혼하면서 ‘바람피울 때마다 물어야 할 벌금 액수’를 적은 약정서를 받았다니, 현대판 신(神)이라는 돈의 위력은 부부라는 성역(聖域)에서도 그 위세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여자는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 여자와 가구는 내돌리면 흠이 난다했다. 이 모두 암탉이 울면 집안에 망한다는 속담과 함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유발한다. 사내들을 모아두고 아내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오른쪽에 무서운 사람은 왼쪽에 서라 했다던가. 모두 우르르 왼편으로 몰려가는데 한 사내만 오른쪽에 남아있었다. 그에게 부러움의 시선이 쏠린 건 당연했고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아내가 무섭지 않을 수 있소?”
사내는 대답했다.
“실은 내 아내가 절대로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해서... ”
그 사내처럼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새 아내의 감시로 수형자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보도다. 전처소생 아들들의 주장에 따르면 콜 총리와 2008년 재혼한 리히터가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며 총리 명의의 편지를 대신 작성하는가 하면 가까운 친지들의 방문조차 철저히 막고 있단다. 그녀가 콜 총리의 문지기를 자처하여 손녀를 데리고 현관문을 두드린 아들들의 출입도 거부할 정도였으니 새파란 나이의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삶의 자유를 상실한 노 정객의 신세가 애잔하기까지 하다.
30-40대 부부에게 서로가 꿈꾸는 노후생활을 물었다. 남편의 75%는 은퇴 후 한적하고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아내의 65%는 대도시 아파트에서 각종 취미를 즐기는 노후생활을 희망했다. 또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남편들의 바람과는 달리 아내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Oh! no!!!였다. 긴 세월 남편과 자식들에 매달려 산 것도 끔찍하고 억울하니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란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재결합하겠냐는 질문에도 여자들의 반응이 심드렁하긴 마찬가지였다.
‘부부사랑의 행복론’, 이는 며칠 전 지인의 이삿짐 정리를 돕다가 주워든 책자다. 지천명(知天命)의 끄트머리에 걸린 나이, 해서 둘 사이 쓴 물 단 물 다 빠진 집주인 부부는 한 치 망설이지 않고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제명(題名) 위에 ‘경제적 풍요만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케치 플레이즈를 내건 책을 먼지 털어 가방에 챙겨왔다. 몇, 몇 지고지락(至高至樂)의 요건들 중 그 으뜸은 부부 간의 화합이라 믿는 내겐 ‘오늘부터 당장 자녀에게 쏟는 관심 중 십분의 일만 남편 혹은 부인에게 쏟아라’는 하단의 문구도 경구로 와 박혔다.
‘采女曰男之盛衰何以爲候彭祖曰盛得氣則玉莖熱陽.... .’
이런 류로 시작되는 원문들을 빼곡히 싣고 쉽게 풀이해 놓았다.
‘채녀가 팽조에게 질문한다.
남성의 정력 성쇠는 어떠한 조짐으로 알 수 있습니까?
팽조가 대답한다.
남성이 원기가 왕성하여 정기를 얻으면 남성의 옥경이 뜨거워지고.... ’
아이쿠머니나! 방중술(房中術)을 다룬 책자가 아닌가!
이순(耳順)이 낼 모레인 내게 새삼 눈과 귀에 거슬릴 말이 어디 있을까만 일순, 귀밑이 붉어진다. 부부 열락(悅樂)의 최고봉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책은 상세한 삽화까지 곁들이며 은근슬쩍 초로(初老)의 여인을 유혹하건만 아서라,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도 유분수지 꽃다운 시절 다 보낸 이제야 뒷북치듯 불쑥 나타나 그렇잖아도 어지러운 머리를 가뜩이나 혼잡하게 할 건 뭐람.
부부(夫婦), 하고 읊조리면 묵은 노트에 스크랩 해 놓은 중국의 사진 컨테스트의 수상작인 ‘귀향(歸鄕)’이 스친다. 안개 자욱한 새벽 들길을 붉고 푸른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부부가 아이 손을 잡고 명절에 친가 나들이하는 모습이다. 부부는 나란히 걸어도, 지아비는 앞장서고 지어미는 멀찍이 걸어도 아름답다. 인생이란 황량한 벌판에서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보조 맞추어 걷는 든든함이다. 둘이서 펼치는 영육(靈肉)화합의 잔치 마당, 하니 여고금슬(如鼓琴瑟)은 크기 다른 두 거문고가 멋지게 어울려 연주되듯 극치를 이루는 부부미를 이르는 말이다.
기원 전 4세기에 제작된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파경(破鏡)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둘 사이 다양한 결을 새겨 넣기도 전에 깨어져버린 거울의 파편들은 왜 이리 많은 지. 한 줌 미련조차 남지 않은 부부 사이에 후유증처럼 남는 건 치졸한 재산다툼, 이럴 때 명쾌한 해결책이 되는 게 혼전약정서일까.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행복하지는 않다. 양보다 질, 잘 받아야 행복하단다. 자기가 주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확신을 주는, 그래서 사랑에도 전략과 기술이 필요하다. 부족하면 빌려오고, 미숙하면 연습하고, 지나치면 자제하는 사랑. 묵묵히 순종하던 아내들의 반란을 다스리는 비법은 바로 그런 사랑이 아닐까. 굴지의 보석세공사인 티파니에서 내놓은 지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크리스털 잔은 이런 의미를 품은 시도였단다. 당신의 아내는 가장 얇은 재질의 크리스털로 만든 잔이니 절대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둘 중 누가 큰 거문고를 맡아 퉁기면 어떠랴. 부부의 위상에서 여성의 지위가 날로 드높아지는 이 시대, 존대하면 뺨 맞지 않는다 했으니 남편제위(男便諸位)는 더더욱 극진히 아내를 살펴 모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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