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자 선정
선정이유서 (장석주 시인)
독자적인 시세계와 언어미학 정립
현대시의 내면 확장과 정신의 심화에 크게 이바지
김영랑 시인은 일찍이 16세 때인 1919년, 향리인 전남 강진에서 3·1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바 있는 실천적인 독립투사이자 민족사상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저항적 현실인식과 비관적 생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글의 문학적 훈련을 통해 민족혼과 민족 정서를 계발하고 민족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진력한 바 있는 이 땅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이기도 하다.
이 점에 비추어 그간 영랑시문학상은 제1회 수상자로 오늘날 남도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인 송수권 시인을 선정하여 계간『시와시학』에 수상자 특집, 송수권 집중연구를 게재한 바 있다. 제2회부터는 계간 시와시학사가 상금은 물론 상 자체를 전적으로 주관하면서 수상자로 역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빼어난 서정 시인인 고(故) 김남주 시인을 선정하여‘문학의 집·서울’에서 시상하고 역시 특집을 마련한 바 있다. 그리고 제3회 수상자로는 빼어난 순수서정 시인인 이준관 시인을 선정 시상함으로써 그 품격과 위상을 확보하여 왔다.
아울러 제4회부터는 영랑의 고향인 전남 강진군(황주홍 군수와 전석홍 전 전남지사)의 실질적인 도움과 영랑시문학회 그리고 강진 군민들의 전폭적인 성원으로 다시 한 번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계간 시와시학사 김재홍 교수의 제안으로 제1회 ‘영랑문학제’를 열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수상자에게는 본상과 우수상 또는 특별상으로 구분하여 본상에는 상금 및 상패를 드리고 역시 계간『시와시학』에 특집으로 집중연구 되는 영예를 드리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삼기 위해 수상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원로·중진·신진으로 그 폭을 넓혔고, 이에 걸맞게 해방 후 여성문학의 개척자인 예술원 회원 김남조 시인을 본상 수상자로, 정일근 시인을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아울러 5회 수상자로는 역시 해방 후 현대시의 한 정상이자 근년에 노벨상 후보자로 계속 거론되고 있는 고은 시인을 선정·시상함으로써 영랑시문학상이 이 땅 문학상의 한 정상의 위치로 격상됐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6회 수상자로는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문학성이 높고 활동성이 두드러진 시인의 한 사람인 신달자 시인을 본상으로, 그리고 광주정신의 한 표상인 임동확 시인을 우수상으로 선정·시상하였다. 또한 7회 수상자로는 목포대학 교수인 허형만 시인과 윤효 시인이, 8회 수상자로는 당대 최고의 저항 시인이자 서정 시인이라 할 수 있는 김지하 시인을 선정하고 우수상에는 김선태 시인을 선정하여 수상한 바 있다.
제9회 수상자로는 현실성과 서정성을 조화롭게 성취한 광주 출신의 탁월한 시인인 고(故) 이성부 시인을 본상에, 역시 담양 출신의 중진 시인인 최두석 시인을 우수상으로 선정·시상한 바 있으며, 제10회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서정 시인이자 불문학자이기도 한 전북 출신 이가림 시인을 선정하여 수상한 바 있다.
올해 11회 수상자로는 1975년 시로 등단하고 다시 평론으로 재등단하면서 창작과 비평 활동을 전개해 온 장석주 시인이 선정되었다. 장 시인은 어느새 시력 40년을 자랑하는 중진시인이자 평론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 분이다. 아울러 장 시인은 출판사‘청하’를 창립하여『고은전집』을 비롯한 수많은 시집을 출간하고 계간시지『현대시세계』를 창간하여 유능한 신진시인들을 발굴하는 등 이 땅 시문화 발전에도 폭넓게 이바지한 역량 있는 문화활동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장석주 시인은 첫 시집『햇빛사냥』(1979) 이래로『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어둠에 바친다』『새들은 황홀 속에 집을 짓는다』『어떤 길에 관한 기억』『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붉디붉은 호랑이』『절벽』『몽해항로』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시세계와 언어미학을 정립함으로써 현대시의 내면 확장과 정신의 심화에 크게 이바지해 왔다. 그야말로 장석주 시 미학의 정립을 통해 시적 개성을 심화·확대하여 한국 현대시의 한 정상 수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번 제1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시집『오랫동안』(문예중앙, 2012)은 근래 시단의 한 성과에 해당한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주역’이라는 사유의 그물로 삶과 세계의 법도와 원리를 심도 있게 포착해 나아가면서 현대시의 폭과 깊이를 밀도 있게 형상화하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시’라는 감각적 사유의 그물로서 삶과 세계의 내밀한 이치와 운행원리를 탐구하려 노력한 것은 현대시사상 매우 의미 있는 일로 판단된다. 특히‘주역’의 운명론과‘시’라는 자유론의 변증법적 관계항으로서 설정하여 삶의 지속과 변화 양상을 깊이 있게 천착해 내면서도 슬픔과 허무로서 생의 근원적 서정을 파악해 낸 것은 가치 있는 일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한편 올해 특별상으로 선정된 전석홍 시인은 영랑시문학의 진흥과 영랑문학제의 발전에 폭넓게 이바지하는 업적과 함께 시집『담쟁이 넝쿨의 노래』『자운영 논둑길을 걸으며』『내 이름과 수작을 걸다』『시간 고속열차를 타고』등 근작 시집에 이르기까지 줄기찬 시적 정진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상찬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향리 영암 출신으로서 전석홍 시인은 남도적 서정과 농경사회적 상상력을 깊이 있게 형상화해 감으로써 생명시학 내지 향토시학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심화해 왔다. 특히 전 시인은 전남도지사 재임 중 개인에게 팔려 버린 영랑 생가를 향토 사랑, 문화 사랑의 정신으로 다시 매입하여 오늘날 국민적인 문학공원으로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아울러 황주홍 전 군수와 계간 시 전문지『시와시학』과 논의하여 영랑시문학상을 ‘영랑문학제’로 확대 시행하여 남도문화, 지역문화는 물론 나아가서 민족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고자 노력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 판단된다. 이에 지난해 전임 황주홍 군수에게 드린 특별감사패에 이어 전석홍 시인에게 시문학 특별상을 드리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장석주 시인의 대성과 함께 전석홍 시인의 정진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남조(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고 은(시인·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이가림(시인·전년도 수상자)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김재홍(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글)
영랑시문학상 수상소감
유빙(遊氷)들이 밀려와 한강 하류가 마치 북극 바다를 방불케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겨울 어느 날에 『시와시학』 관계자에게서 제가 영랑시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었다는 뜻밖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물론 뛸 듯이 기뻤지요. 하지만 마냥 의기양양하지 못 하고 조심스러웠던 것은 과연 헐거운 인생을 살아온 제가 자격을 갖췄는가 하는 의구심이 마음 어느 구석엔가 있었던 탓이죠. 저는 역사의 개별보다 시의 보편을 더 신뢰하고 흠모해온 몽매한 자입니다. 산에 핀 제비꽃이 바위를 깨뜨린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시인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제 안의 몽매함은 제가 서른 몇 해 동안 시를 밀고 오게 한 동력입니다. 세상의 모든 바위들보다 제비꽃이 더 힘세다고 믿는 몽매함으로 이 과분한 상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어려서 뭣도 모른 채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좋아했습니다. 그 밑바닥에 깔린 슬픔을 다 알지도 못한 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영랑은 도른도른, 살포시, 보드레한, 즈르르, 애끈한, 조매로운, 아롱지는, 그리메, 서느라워, 가부엽게, 흐렁흐렁, 호동글, 홋근한, 서어한, 호젓한, 파름한, 섯드른, 바람슷긴, 포실거리며........ 따위의 어휘들로 토속어 정감을 화사하게 펼쳐냈지요. 그쪽 분야에서는 백석이나 미당과 견줘 조금도 빠지는 바가 없습니다. 영랑이 생전에 유성기로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를 들으며 “이게 이 나라의 제일 슬퍼 못 견딜 소리”라고 했다지요. 그분은 남도의 귀명창이었지요. 이 귀명창이 이 나라의 제일 슬퍼 못 견딜 소리에 감응하면서 모국어로 빚어낸 게 영랑의 시입니다. 영랑에 그토록 끌리고 감탄했던 것은 모국어의 맑은 울림이 일으키는 황홀경 때문이지요. 영랑 내면의 깊은 곳에 슬픔의 근친애(近親愛)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저는 영랑의 내면에 번성했던 저 슬픔의 먼 방계(傍系) 쯤 되겠지요. 영랑은 “사람이 아무리 서럽고 비참해도 역시 촉기는 어딘가에 있어야 해.”라고 하셨다는데, 제게 그 촉기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촉기란 핏속에 녹아있는 번쩍임 같은 것이겠지요. 시가 만능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조촐한 발명과 성찰의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촉기가 필요하겠죠. 필요하다면 눈썹을 다 뽑아서라도 그 촉기를 만들겠습니다.
수상소식을 듣고 며칠 지난 뒤 여러 선생님들이 살갑게 거명해주셨다는 제 시집 『오랫동안』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득선(得仙)도 학득(學得)도 없는 이 무용한 물건을 한밤중에 마치 당대(唐代)의 별자리 그림이라는 돈황성도을본(敦煌星圖乙本)을 들여다보듯이 덤덤하게 봤습니다. 시(詩)와 역(易), 오늘의 일들과 상고(尙古)의 지혜가 얽히긴 하는데, 한 화음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제각각 딴 소리를 내고 있군요. 그 소리들의 한쪽에 제 슬하의 슬픔과 불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군요. 그럼에도 이 보잘것없는 시집이 각별했던 것은 시골구석에 처박혀 곰삭은 외로움을 다만 외로움으로 견디고 뜰에 모란 작약이나 키우며 살려고 했던 제 마음의 가난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싸라기눈 이마를 때리는 날엔 / 유월 모란 화투 패로 운세를 짚고, / 동지 뒤 초밤엔 / 폭설에 소나무 가지 꺾이는 소리를 듣고, / 묵밥을 먹자. / 묵밥을 먹은 저녁엔 / 온잠을 자고 / 가래똥이나 누며 살자.”(「묵밥 2」) 같은 구절들에 제 마음의 궁상(窮狀)이 숨길 수 없이 나타납니다. 찬란(燦爛)은 없고, 불행과 슬픔들의 자취는 희미합니다. 장강과 황하도 얕은 물에서 시작했다는 옛사람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고단하게 왔습니다. 제 어리석음이라면 어리석음이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시는 이미 제게 많은 것들을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야, 토설합니다. 외로움에 졌습니다! 포달스런 늑대로는 살지 못하겠죠. 앞으로는 풀포기와 같이 익명의 식물성으로 여리디여린 그늘들이나 삼키며 살아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상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장석주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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