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可恐)할 세뇌의 위력
김현철(전 언론인)
히틀러 나치 친위대(Nazi Guards) 소속 여군 장교였던 ‘에봐’ 중위가 패전 후, 감옥에서 죽음(처형)을 앞두고 그동안 유대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던 지난날을 일기 형식으로 써서 회개하는 장면을 보면, 어느 인간이나 일단 세뇌(Brainwashed) 를 당하면 이성도 양심도 완전히 마비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에봐 중위가 쓴 일기 중 중요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치 상사들로부터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 욕심만 채우는 돼지들(Pigs)’이라고 배워 오면서 우리(친위대)는 추호도 이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대인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어 패전 후 체포될 때까지 양심의 가책 없이 친위대 장교의 긍지를 지니고 이 성스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포된 후 죽음을 앞두고서야 조금씩 이성을 되찾으면서 내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해 왔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그동안 저질러 온 일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위 예가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세뇌’가 된 인간은 못할 짓이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믿어 옮겨 본 것이다.
언론이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해 깡패 노릇을 하는 등 ‘사이비’로 전락해서 인권을 마음대로 짓밟아도 이미 세뇌된 독자는 이 엄청난 사실마저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바로 ‘세뇌(洗腦)의 가공(可恐)할 위력(威力)’인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이 사이비 언론이 정통언론으로 돌아오면 독자들은 빠른 시일 안에 이성을 되찾게 되지만 그 신문의 편집자 본인 및 그를 추종해 온 일부 기자들과 직원들의 양심은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더 늦는 게 정상이다.
잘 못된 편집자가 오랫동안 영웅으로 보여 왔기에 이들은 ‘영웅숭배자(Hero-worshiper)’로 철저히 세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 자신이 쓴 기사들을 돌아 볼 기회가 왔을 때 정상적인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감정에 치우쳐 이렇게 과장 보도를 할 수 있었을까?’, ‘ 그 때 지역신문 머리기사로 다루었어야 할 큰 기사를 내 감정 때문에 너무 작게 축소해 보도했었구나’, ‘아니, 내가 그토록 존경(?)하던 아무개 편집국장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일을 이렇게 과장해서 편집할 수 있었을까? 그 때 그 피해자는 이 기사로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등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게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강진 및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의 현실이, '철저한 기자 교육’ 없이 바로 채용된 기자를 취재 일선에 내보낸다는 데에 있다. 정상 언론의 경우 최소 6개월에서 1년 간 ‘출입처에 따른 기사 작성법’, ‘각 분야별 취재 방법’,‘뉴스 쏘쓰(뉴스源, News sources)를 대하는 기자의 자세’, ‘기자가 갖춰야할 윤리도덕성’등등... 철저한 교육을 마친 다음, 취재 일선에 내보낼 때도 못 미더워서 선배 기자와 동행 취재하도록 해서 수습과정을 마치게 하고 있는데도 간혹 실수를 하는 판에 그러한 철저한 사전 교육 없이 떳떳한 실력을 갖춘 기자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선배 기자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언론계의 선후배 관계는 매우 끈끈하고 엄격한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필자의 오보사건 한 토막을 공개한다. 필자가 월남전 종군기자로 나가기 직전이었던 1967년 봄, “해군본부의 군수참모가 업자와 결탁해서 가장 성적이 좋았던 자기 회사를 제외시키고 두 번째 업자를 택해 특혜를 준 사건”이라며 업자가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해 왔을 때 필자는 그만 의분을 못 참고(감정에 치우친 실수) 이를 해군 측에 사전 확인 없이 기사화함으로써 필자의 기자 생활에 처음이고 마지막인 오보를 발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해군은 이 사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으나 필자의 보도로 이 사업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이 기사로 전체 해군사관 생도를 비롯해 동서남해 함정에 승선 중이던 다수의 정의파 해군장교들이 “왜 그런 사업을 벌여서 전국에 해군의 명예를 더럽히느냐? 당장 사업을 중단하라!”고 연서로 건의서를 작성해서 김영관(대장) 당시 해군참모총장에게 진정을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기사가 오보냐 아니냐를 떠나서 해군본부가 이 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 전 해군 장병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필자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업자가 다른 업자가 하게 된 사업을 자신이 빼앗기 위해서 꾸민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양심에 얼굴이 새빨게 진 필자는 즉시 해군본부 정훈감(당시는 각 군 본부에 공보실이 없었고 정훈감실에 공보과가 있었음) ‘이 모’ 대령을 찾아가 “어쩌다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러 죄송 천만입니다.”하고 정중히 사과하며, 속죄하는 의미로 군수참모와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했으나 이 대령의 대답은 엉뚱하게도 “아닙니다. 물론 기사 내용이 사실과는 좀 다르지만 군에서 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어쨌건 김기자님 덕분에 우리 해군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지저분한 사업에서 손을 떼는 계기가 됐으니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하며 웃었다.
기자는 기자 이전에 인간임을 겸허한 자세로 인식하고 ‘혹시 내 언행(기사)에 상처 입는 분은 없는지, 감정에 치우친 실수는 없었는지? 과장 보도는 아닌지?’를 항상 돌아 볼 줄 알 때 경솔에서 오는 실수는 대부분 예방되는 반면 독자들의 사랑과 존경은 더 많이 받게 된다는 사실을 필자 스스로가 뼈저리게 터득한 사건이었다.
인간이 만들다 보니 어느 언론사나 자질구레한 실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실수가 아닌 '악의 있는 감정 보도'로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이 신문사 이사진을 비롯해 누군가는 더 이상 이‘사이비 언론’의 추태 내지 광기(狂氣 = 미친 기운)를 중단 시킬 방법을 모색해야 '건전한 강진사회'가 유지되어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필자가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계속 광기를 부리는 신문은 처음으로, 다시는 이런 언론을 접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뿐이다. (kajhck@naver.com)
필자가 서울 MBC 종군 기자 시절인 1967년 7월 8일 주월한국사령관실에서 가진 채명신사령관과의 단독 인터뷰 모습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