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시는 날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눈이 온다’와 ‘눈이 오신다’의 차이는 크다. 반말 투의 온다에서는 얕보이는 상대에게 당신 정도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우월감이, 반면 오신다는 깍듯한 경어체에서는 감히 대들 수 없는 웃 분에게 나붓나붓 순종하겠노라는 겸손함이 풍긴다. 그렇다면 ‘어여쁜 눈송이가 귀밑터럭에 내려앉아 내게 은근한 정을 표하였다’는 문구가 들어가는 정조시절의 문사이신 이덕무선생의 칠십리설기(七十里雪記)는 전자에, 도시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요 며칠 전의 폭설은 후자에 해당하리라.
오던, 오시던 유년시절의 나는 눈이 내리면 무작정 좋았다. 돌연한 눈사태에 휴교령이 내렸던가, 아니면 때 마침 방학이었던가. 등교는커녕 문 바깥도 얼씬할 수 없도록 쌓인 눈은 뒹굴뒹굴 게으름 피우기에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아늑한 동굴처럼 조도 낮은 방에서 머리맡에 두툼한 부피의 만화책을 쌓아놓고 달큼한 사탕 아껴먹듯 기나긴 하루를 야금야금 궁구려 먹는 맛이라니! 직공들이 결근한 아버지 공장에서는 망치소리, 쇠 깎는 기계의 굉음도 멈추었다. 한쪽 귀의 기능을 상실 때문인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난 듯 호령조 일색이었다. 어쨌든 그 시절 집안을 휘젓던 아버지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도, 부잡쟁이 두 동생들의 활기가 빚는 소란스러움도 싫었다. 잠에 빠진 동생들의 낮은 코골이 소리 뿐, 무언가에 항시 부산하던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이층의 내실에서 머리 맞대고 묵은 장부정리라도 하시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던 눈 내리시던 날의 적요.
살강과 요강과 뒷간과 뜨뜻한 아랫목.... . 눈과 함께 떠오르는 애틋한 것들이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몸짓으로 분주히 살강을 오르내리며 군입거리를 만들던 언니들, 털신 가득 소복한 눈을 털고 맨발을 들이밀던 때의 섬뜩한 감촉, 동생들을 꼬드겨 단체로 가던 뒷간의 정겨움... . 이런 유년의 따뜻한 기억들과 재회하는 시간이 없다면 내 삶은 얼마나 황량하였을까. 청소년 시절에 드러나는 특정한 기질이 장차 그 사람이 이루게 되는 어떤 성취와 무관하지 않다면 침침한 방에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누워 책읽기를 좋아하던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눈 내리시는 날의 백미인 ‘너의 만사를 제치라’는 명령에 충실한 게으름뱅이가 그 완성인가. ‘도둑놈 접굴’이라셨던가. 밝음기피증에 가까운 딸의 괴벽을 어머니는 자주 핀잔하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환한 대낮에도 커튼을 드리운 어둑신한 방에서 램프를 켜고 책 읽길 즐긴다. 나는 책벌레, 이른 바 간서치(看書癡)다. 고요롭게 갈앉은 방의 한 귀퉁이에 박혀 하염없이 책 뒤짐질 하길 즐기는 것이다.
시마무라- 서양무용을 연구하며 일정한 직업 없이 등산 여행을 즐기며 눈고장의 어린 게 이샤와 사랑에 빠진다.
고마꼬-어릴 때 동경의 요정으로 팔려 눈고장으로 춤선생을 따라 온 어린 게이샤. 춤선생의 아들인 유끼오의 약혼자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시마무라와 사랑에 빠진다.
요오꼬-유끼오의 애인. 그를 간호하며 눈고장에 돌아왔으나 결국 애인도 죽고 자신도 자살 하다시피 화재로 죽는다.
유끼오-병이 들어 애인 요오꼬의 간호를 받으며 눈고장으로 돌아오나 결국 고마꼬를 부르 다 죽는다.
생의 어느 한 날 외딴 곳에서 폭설로 한 며칠 고립되고 싶다던 시인이 있었던가. 그런 곳에서 누군가와 절대 절명의 사랑에 빠지고 싶다했다. 노벨상 수상작인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의 주인공들, 그들의 프로필요약에서는 빠짐없이 ‘눈고장’이라는 소개말이 등장한다. 눈사태에 갇혀 예정된 행로에서 비껴간 삶을 가게 된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의 인생길을 어긋나게 하는 건 눈길만이 아니다. ‘1주일 쯤 그다지 말을 주고받은 일이 없던 뒤인지라 사람을 그리는 정이 따뜻하게 넘쳐흘러서 낯 선 여자에게서 우정 같은 것을 느꼈다’던 시마무라는 작가의 분신이었을까. 말도 채 익히기도 전 잃은 양친에 이어 단 하나뿐인 누이, 그를 돌보아주시던 조부모까지 어린 그를 덩그마니 남기고 먼 길을 떠났으니 문학만이 잃어버린 육친을 추모하는 방법이고 외롭고 허무한 인생을 견디는 힘이라고 했던 가와바다 야스나리, 그가 영예의 절정에 이른 순간 원고를 쓰던 만년필의 뚜껑조차 닫지 않은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는 뭘까.
길은 얼고 마을은 한기 속에 묻혀 고요히 잠들어 있고 달은 파란 어둠 속의 칼날처럼 걸려 있는 날, 고립이 주는 속수무책에 우리가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그 간극도 절감한다. 우리로 하여금 무능에 빠지게 하는 눈 내리시는 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혹시라도 그대가 여기 있을까 기대하고 바람처럼 달려가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소! 하늘만 쳐다보고 장탄식을 하노라니 서글프고 외로워서 마치 장님의 길잡이가 없는 신세였소.’ 글에 대한 반성문을 요구하는 왕의 명령조차 콧방귀였던, 천하의 박제가가 궂은 날씨를 무릅쓰며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맨 그다. 어디 박제가 뿐이던가. 남공철, 김려가 다투어 그의 전기를 썼으며 이덕무, 유득공이 자신들은 감히 그의 재능에는 못 미친다고 고백하였다. 이 눈 오시는 날 나는 그 멋진 사내와 조우한다. 시대와 불운한 천재, 스물여섯의 김용행, 눈처럼 쌓인 오랜 세월에 꽁꽁 묻혀진 그를 불러내 가멸 없는 애정행각에 빠지는 이 눈 내리시는 날, 부신 눈빛처럼 정갈한 황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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