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 관하여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망(望) 팔십에 이른 k회장님께서 원고지를 내미신다. 칸마다 또박또박 눌러 쓴 연필 글씨는 문중지(門中誌)의 서두에 실릴 발간사다. 전국 각처의 종원(宗員)들의 원고를 규합해 수정, 한문 원본을 일일이 대조하는, 이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 끝나면 당신께서도 맘먹고 컴퓨터를 배우실거란다. 행여 밥값이라도 치를라치면 손 내저어, 아니 호통을 치시며 말리시는 분, 지난 번엔 멋진 청바지 차림으로 캐쥬얼의 진수를 보여주셨던가. 닮고 싶은 멋진 노후 모습이다.
그날 내내 목이 아렸다. 노인요양시설에 계신 시외숙모님을 뵙고 난 후 생긴 증상이다. 양쪽으로 배열된 침대마다에 눕거나 앉은 노인들은 하나 같이 멍한 표정이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간병인들의 지청구를 들으며 억지 밥을 받아먹던 두어 분은 잔뜩 주눅까지 들어 보인다. 유심히 표찰을 살핀 건 그 분들의 연세가 궁금해서였다. 67세, 72세, 74세... , 겨우 그 나이에 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81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단편소설 당선작인 ‘양로원’의 배경은 미국이다. 작자인 강진 출생 이건숙씨의 당시 나이가 41세니 그녀도 어느덧 70, 고희(古稀)에 이르렀다. 이국땅에서 가족에게 버림 받은 주인공은 흐린 시선에 무엇을 읽을 수도, 그렇다고 딱히 대화를 나눌 친구도 없다. 젊은 얼굴, 그들의 냄새와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립다던 동양여자의 눈에 비친 필라델피아의 양로원 풍경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편의를 위해 수시로 투여되는 신경안정제 낙틴, 솜뭉치를 집어넣어도 침구를 흥건히 적시는 욕창, 살로 파고드는 손톱과 발톱을 V자로 깎아주는 풋닥터라는 전담의사도 등장했다. 흰 천장, 흰 벽, 흰 환자복... . 온통 흰색으로 통일된 병실은 삭막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혈압수치가 제로에 다다르자 간호사들은 산소탱크를 옮겨놓는다. 환자 가족들에게 끝까지 최선의 조치를 다했다는 표시용이란다. 그들만 최선을 다 했을까. 말을 잃고, 움직이는 기능을 잃고, 사형수처럼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환자들도 그동안 최선을 다한 삶을 꾸렸을 터. 임종을 지키는 것을 고인에 대한 큰 예로 삼는 우리와 달리 장례사가 시신을 깨끗이 목욕시킨 후 예쁜 옷과 화장, 그리고 꽃으로 장식을 마친 후 마지막 인사를 시킨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추한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해마다 늘고 있는 것은/ 귀밑 가장자리에서 정수리로 면적을 넓혀가는 흰 머리카락/ 눈 밑 언저리와 목둘레로 줄줄이 깊어가는 주름살/깨알글씨를 만날 때면/ 햇살이 환히 비치는 곳, 그것도 부족하여 창문까지 열고/단어를 책갈피에서 줍고 있지/이제 흔들거리는 어금니 건강을 쪼아 먹으며/빗물에 무너지는 흙담장처럼/춥지 않아도 무릎 시리고/바늘귀에 실을 꿰는 일도 나날이 더디어 가고 있지.
노스님의 이런 탄식조 글귀에서 나라고 자유로울까. 퉁소소리, 북소리에 맞춰 뱃노래 부르는 그 환락이 지극한 순간에 외려 비참한 마음이 일어난다던 한무제다. 동쪽 난간의 배꽃, 그 눈부신 꽃의 청아함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탄식했다. 환갑을 두어 해 앞 둔 김사장님의 단골멘트가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한 오십년인데...’였던가. 아닌 게 아니라 과학과 의학을 비롯한 여러 전문분야의 발전 덕택에 사람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 잔 루이스 칼망이라는 프랑스 여자는 무려 122세까지 살았다. 수명은 산처럼, 복은 바다처럼이라 壽似春山千載秀요, 福如滄海萬年靑다. 하여 수산복해(壽山福海)는 천수기원 덕담의 으뜸문구지만 장수(長壽)? 글쎄다.
어떤 소년이 신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을 그냥 건너뛸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학교에 가면 노는 시간 뿐, 공부할 시간은 사라졌다. 그는 순식간에 어른이 되었고, 힘들여 일할 시간, 병으로 앓는 시간도 사라졌다. 결국 그는 겨우 몇 달을 살다갔다. 우리의 삶이란 그다지 즐겁지 않은 날들로 채워진다는 우화다. 그렇다면 삶에 끌려 다니며 낡아버린 육체를 훌훌 버리고 옮겨 가는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떠날 곳의 정처도 모르면서 구차해지기 전 미련 없이 이주하는 행운을 주시길, 그 소망이 복지시설의 노인들을 뵙고 난 후 더더욱 간절해진다.
연못가 봄풀의 꿈이 미처 깨지 않았건만 계단 앞 오동잎에서는 가을기색 완연하다 했다. 또한 풀잎의 색이 진실로 새로워지는 것은 가을이라는 절기가 지난 후라는 위로의 글귀도 있지만 구십 구세까지 펄펄 뛰는 건강체라는 99팔팔은 과욕이다. 추레한 몰골로 너무 오래 사는 것도 흉이니 ‘딱 75세 정도 건강히 살다가 자기 집 안방에서 아쉬움 속에 가는 것’이 노년 입구에서 서성이는 대다수의 중론이다. 하지만 마음대로 늘일 수도 그렇다고 억지로 생에 가위질을 할 능력도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바라노니 제발이지 내 손으로 끼니 해결할 건강을, 아니 부디 부디 밝은 정신만은 생의 끝 순간까지 놓지 말기를 기원해 본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