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통신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이 있었다. 잠깐, 그 왕을 소개하기 이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이가 있다. 높은 성덕을 지녔던 그는 훗날 수호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살아생전 그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어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종종 미래를 예언하였으며 먼 훗날의 일을 마치 현재의 일처럼 꿰뚫어 알려주기도 하는 초능력을 지녔다. 다시 왕으로 돌아가서 어느 날 사냥에 나선 왕은 뜻밖의 사고를 맞는다. 사랑해 마지않던 조카를 사슴으로 오인해 겨냥한 신하의 화살에 아이는 그만 절명의 위기에 이른 것이다. 슬픔을 못이긴 왕은 서둘러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를 찾는다. 조카의 목숨을 구하는 기도의 은사를 부탁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나는 그대가 나를 찾아 온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부탁하려는 것을 나는 들어줄 수가 없다.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검을 들쳐 업은 기사를 향해, 훗날 하늘 높은 곳에 올라 교구와 신자들의 보호간청의 기도 속에 등장하는 예언자 바우돌리노가 했다던 말이다. 에코는 지적한다. 왕은 바르게 처신했으며 위대한 성인의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실제 삶에서는 어느 누구도 매일같이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슬기로운 사람은 아무 때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계제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나 또한 왕처럼 기적을 조르고 있는 셈이다. 며칠째 파리에 휩쓸려 지내는 중이다. 눈을 뜨면 파리의 거리와 그 곳의 미술관 풍경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지금도 텔레비전의 화면 가득 ‘자전거로 한 파리여행기’가 흐르며 방바닥에는 파리거리의 휴대지도가 널브러져 있고, 자판을 두드리는 좁은 책상 위에는 여행안내 종이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두툼히 쌓여있다. 더구나 방 안에서 손에 잡히는 건 이런 류의 파리여행기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은 길을 도통 모른다. 생 쉴피스 광장으로 가달라고 하면 오데옹까지 가서 차를 세우고는 더 이상 모르겠다며 승객을 내리게 한다. 그러기 전에 승객은 ‘어, 아저씨, 이거 왠지......’ 하면서 이따금씩 까다롭게 굴었던 대가로 운전사의 긴 푸념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에게 지도를 보라고 권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아무 대꾸를 안 하거나 참고 문헌에 관한 정보를 원했다면 소르본 대학의 고문서 전문가에게 문의하지 그랬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계 운전사들은 특별한 부류를 이룬다. 그들은 지극히 친절한 태도를 보이면서 순환 도로를 세 바퀴쯤 돈 뒤에, 북역이든 동역이든 기차가 많기는 마찬가진데 굳이 북역으로 갈 게 아니라 동역에서 내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잦은 방문에 필자의 권태기미가 슬그머니 엿보이는 글이다. 하지만 내겐 행선지가 동역이면 어떻구 북역이면 어떠랴. 움베르토 에코의 파리통신까지 읽고 있으니 내 어찌 파리에서 놓여나겠는가. 아직은 미답인 이국의 매력적인 여행지, 그에 대한 선망이 우선했을 것이다. 너무도 간절해진 나머지 도나캐나 에코의 글쓰기 기법이라도 흉내 내려는 걸까. 부러 의도한 바 없건만 잘 알려진 대가의 기법이나 양식을 흉내 낸다는 모방작법인 파스티슈로 치닫는 글이다. 자신의 칼럼 코너에 신문기사를 발췌하거나 다른 글을 익살스럽게 인용하는 ‘아주 작은 일기’형식의 글을 자주 기고했다는 에코, 이 글 역시 두서없이 펼쳐지는 일기체이니 나의 어느 한 시절을 기록한 ‘디아리오 미니모’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약간 힘들다는 사전충고가 곁들여 있다. 그렇다고 드높은 에펠탑에 올라 360도 펼쳐진 파리 시가지 전망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시간을 빼먹으랴. 세느강 맞은 편 기슭에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우아한 장관을 자랑한다는 샤요궁전과 19세기 초에 만들어졌다는 강변 산책로인 백조의 작은 길도 잊지 않고 찾으리라. 이윽고 아치와 폭포로 조성된 영국식과 직선적인 형태의 전통 프랑스식, 두 나라의 정원 방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는 샹 드 마르스 공원... 이렇듯 파리의 명소 이 곳 저 곳을 거닐다 지친 나는 잠시 칼바도스를 마시며 파리에서 재충전의 밤을 맞는... , 그 환상에 빠진다. 그런 밤이면 나또한 누군가를 향해 엽서를, 이른 바 ‘파리통신’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아직 살아 있으니 내게는 바우돌리노의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인가. 그렇다고 딸아이의 신혼여행에 줄레줄레 따라나설 순 없을 터. ‘어떤 모습으로든 제 생의 한순간이 당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기껍습니다.’ 언젠가 이런 문구를 썼던 기억을 되살려내며 파리, 그 도시를 향한 목마름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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