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꾸는 꿈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매사에 떳떳한 사람, 스스로 자랑스러운 사람, 명실상부한 문필가’ 이는 수첩의 첫 장에 적어놓은 올 한 해 나의 목표였다. 돌연한 암 의심의 통보를 받고 가슴 조인 지난 해 끝자락, 그 일주일이 내 생의 방향을 궤도수정하게 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 얼마나 충실한 삶이었는지.
생의 날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마 모를 리야,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를 망각한 나날들이었다. 부질없이 흘려버린 날들에 대한 후회는 당의정이 벗겨진 약 맛이었고 한편으론 당신의 계약기간은 얼마지 않아 끝나리라는 연락을 받은 세입자처럼 쓸쓸했다.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그러고 보니 미당 문학상을 받은 정현종시인의 ‘견딜 수 없네’라는 시제(時題)를 입에 매달고 살던 때가 있었다. 적막강산에 든 듯 외로웠고, 땡볕 내리꽂히던 여름날처럼 신산한 날들이었다.
“젼딜 수 읍네!”
전라도 식으로 변형시켜 애써 우스개로 포장했지만. 시퍼런 기 여전하던 젊은 날들이었다.
그리도 지루하던 날의 느낌들이 일순 급변했다. 가슴 속에 시한(時限)의 계기를 장치한 듯한 촉박감이다. 아이들이 하나 둘 독립해나가자 그나마 책임감이라는 명분이 지탱해주던 삶에서 놓여난 해방감은 잠시였다, 후련함도 순간이었다. 오랜 억압에서 풀려난 수인(囚人)처럼 매사가 낯설고 황당했다. 그리고 이어지던 무미건조의 날들. 비록 무위로 끝났지만 건강검진의 노란 형광펜의 위력, 그 여파도 있었다.
극심한 우울증이랄까. 걸핏하면 촛불 곁들인 채식 정찬이 떠올랐다. 오렌지 세 조각에 야채샐러드, 고향집 어머니의 햄버거 한 개, 거기에 신선한 오렌지 주스 한 잔... . 이는 사형수에게 베풀어진다는 마지막 식사 메뉴 아니던가. 어디선가 읽은 이런 풍경도 펼쳐졌다.
남쪽 벽의 움푹 패인 공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의 몸은 의복, 무기, 홀, 방울, 머리 장식, 기장, 금제 및 금동제 복식, 수천 개의 조개 구슬로 만든 가슴 꾸미개, 목걸이, 코 장식품, 왕관, 모자이크 무늬의 귀 장식품 등 수 많은 부장품들로 덮여 있었다. 그 사판왕은 구리로 이어 만든 목관에 안장되어 있었으며 3명의 부인, 2명의 전사, 감찰관에 경호원, 그의 애견까지 발이 잘려나간 채로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그의 생전 측근들이다.
고대인들은 관습과 신념에 따라 왕이 죽으면 왕과 함께 순장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던가. 그렇다면 내세울 권력이라곤 없는 나를 옹위할 그 무엇이 있을까. 거느리고 갈 것 없으니 후일에 너무 기대 걸 것도 없다. 크게 비관할 것도 없다. 지금, 지금만이 내게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사람살이는 고달팠지만 길목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습습히 배인 향기가 있었다. 뒤 돌아보면 지나온 길 어느 갈피고 情의 꽃 아름다이 어우러진 들길이었다. 점차 빨라지는 시간의 춤 템포에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에 휩싸이는 이유다. 그 두려움을 걷어낸 건 18세기 중인 신분의 시인이 자주 입에 올렸다는 아만(我慢)이란 단어다. ‘거만한 듯하다’는 오연(傲然)도 좋다.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를 비웃으며 ‘나는 나를 벗하지 남을 벗하지 않는다.’했다. 시시각각 나를 팽개치고 달아나는 세월의 발을 잘라 낼 재주는 없지만 저 광대한 우주와 맞바꿀 가치가 있다는 내가 아닌가. 훗날 나의 유일한 부장품은 내 꿈과 그를 이루려던 날들의 추억일 터, 자신의 주검을 순장자들로 두룬 2000년 전 왕 닮은 호사까지는 아니겠지만 이제부터 내가 오롯이 돌 볼 대상은 나라는 자각이다.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의 첫 말을 딴 ‘진달래’는 건배사의 단골메뉴다. 이미 흘러간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나중이라는 아직 당도치 않은 미래는 너무도 불확실하니 아등바등 매달릴 까닭도 없다. ‘따뜻한 심성을 잃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멋지게 사는 것’ 이 정도가 이제 새로 마련할 경인년 수첩의 첫 문구로 마땅할까. 납월(臘月)의 끝자락에 만감이 교차한다. 아듀! 다시는 오지 않을 2009년, 어차피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유한(有限)의 날들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내가 바라던 나, 내가 꿈꾸던 날들로 꾸려보자. 고작 지천명 중간에 이런 납회(納會)의 꿈이라면 엄살인가.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