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 하는 한국사 - 청백리 황희黃喜
HOME 회사소개 이용약관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기자회원신청
로그인 회원가입
기본스킨 오렌지스킨 보라스킨 연두스킨 그레이스킨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뉴스홈 > 만평
2024-06-18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 하는 한국사 - 청백리 황희黃喜

황희는 정치가로서 많은 업적을

시서詩書의 문장가로도 이름을 높혀

수많은 일화를 남긴 청백리 황희黃喜

14세에 음관으로 안복궁 녹사安福宮錄事가 되었고 21세에 사마시,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27세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 이듬해 성균학관이 되었다. 이조에 들어와 정자 · 교관 · 경력 · 사간 . 대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그가 정치가로서 능력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진 사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대사헌, 견명사, 참찬, 평안도순문사, 한성판사 등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태종 131413년 세자 양녕대군의 폐 립문제에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가 뒤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남원으로 축출되었다. 1422년 세종 4년에 태종은 그를 다시 불러 세종에게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처음에 참찬직을 내렸고, 후에 영의정으로 명해 국정을 위임받아 애쓰다가 1449년 세종 3186세로 은퇴하였다.

황희는 1363 고려의 공민왕 12~1452 문종 2년까지 살았으며, 이조 초의 명상 본명은 수로, 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시호는 익성군翼成君이다. 본관은 장수長木, 판강릉부사判江陵府使 황군서黃君瑞의 아들,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 출생이다. 저서는 방촌집尨村集이 있다. 그는 평소 인자하고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으며 죽 은 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리는 황희는 고려 말에 태어났다. 이조가 세워진 후 태종과 세종, 5대 문종에 이르기까지 유명 재상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특히 황희에 대한 일화가 많으며 지금까지도 청렴결백한 정승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황희가 태어나 자란 시대는 고려 말 실로 혼란기였다. 밖으로는 왜구의 해안 침입이 잦았고, 북방에서 홍건적이 출몰하였다. 원나라의 압력에 거기에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해가는 시기였다. 고려 말, 노국 공주가 난산 끝에 죽자 공민왕은 비통에 빠져 국정을 외면한 상태에서 중

신돈을 사랑하여 그를 사부로 높여 주고 국정까지 맡겼다. 이때부터 고려는 쇠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오래가지 못하고 공민왕이 시해되고 이어 우왕 · 창왕이 폐위되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때에 21세의 황희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27세에 문과에 합격한 뒤 성균관학관에 임명됨으로써 황희의 파란 많은 벼슬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황희가 첫 벼슬을 맡은 것이 고려 말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였다. 이후 이조가 시작되면서 세자우정자를 삼기 위해 경명행수의 자리를 뽑는데 여기에 황희가 특선으로 뽑혔다. 이로부터 60여 년간 그의 영욕의 기복이 계속되었다. 흔히 황희 정승하면 풍채가 크고 원만한 성품의 인자한 정승으로 떠올리게 된다. '방촌선생실기' 라는 책을 보면 85세 고령의 황희 정승은 '얼 굴은 붉고 머리는 희며 바라봄에 마치 신선처럼 보인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풍모의 황희에게는 원만한 성품의 인물임을 알려주는 일화도 많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의 하나디. 어느 날 집안 하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끝난 뒤 한 노비가 상대방의 잘못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잠자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싸웠던 다른 노비가 달려와 자기주장을 폈다. 역시 황희는 다 듣고 난 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또 그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본 황희의 조카가 '무릇 세상사에는 반드시 옳으면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으면 옳은 것이 있는데 어찌 동시에 두 개가 다 옳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황희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그래, 네 말도 과연 옳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실 황희가 시비의 옳고 그름을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혼란스런 시기에 작은 일을 놓고 시비를 따져 한쪽 편을 들어주어 더욱 어려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깊은 생각에서 그런 판단을 보여준 것이다. 그 토록 사려 깊은 황희도 그의 일생에서 항상 곧고 바른말을 굽히지 않았음으로 두 번씩이나 좌천의 수모를 겪었고, 세 번의 파직까지 당하였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서인으로 몰리기도 하였고 귀양살이를 4년이나 감수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90세의 일생을 마치기까지 그의 파란 많은 벼슬살이와 그에 따른 공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60여 년 벼슬에서 세종 임금 때만 영의정 자리에 18년간 있었는데, 32년간의 세종 시대로 보면 반 이상을 황희가 영의정 벼슬을 맡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황희는 너그러운 성품과 청렴강직함으로 해서 두루 널리 존경과 칭송을 받은 인물이다. 황희 정승의 평소 생활이 검소하였고 당시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라면 넘치는 호화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황 정승만은 그렇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후 대에까지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세금을 면제해 주고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청에서

옷과 양식을 대주고 친척들에게 보호 조치

 

어느 날 임금이 갑자기 황정승 집을 찾아갔다. 임금을 맞아들인 방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자 임금이 시치미를 떼고 '이 자리는 가려운 등을 긁는데 참 좋겠군요' 하였다는 것이다. 황정승의 평소 생활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인 것이다.

'방촌선생실기' 라는 책에 들어 있는 일화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황정승의 큰아들이 새로 집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 많은 백관들이 찾아왔다. 그때 황정승도 처음 아들 집을 갔는데 집안을 둘러본 황정승은 아무 말도 않고 집을 나와 돌아와 버렸다. 그러자 모였던 백관들도 다 헤어지고 말았는데, 이때 깨달은 큰아들은 그 집을 헐고 다시 조촐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청백리 황정승의 이러한 강직한 성품은 본시 타고난 것으로 생각된다. '동야실록東野實錄' 에 의하면 황희가 벼슬을 얻기 전 어느 날 처갓집을 갔다. 평소 황희는 말이 없고 조용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를 답답하게 여긴 처갓집 하인이 술을 잔뜩 먹고 황희를 마치 바보 손님을 대하듯 버릇없이 대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황희는 불평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도가 넘치자 마침내 다른 하인을 불러 버릇없는 하인을 심하게 벌하도록 명하고, 그 벌이 끝까지 집행되는지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황희가 호조판서직에 있을 때가 54세였다. 그런데 이때 세자인 양녕대군을 싸고돈다는 이유로 공조판서로 좌천되었다. 이어 2년 뒤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서인으로 강등되어 지금의 경기도 파주로 쫓겨나고 말았다. 여기서도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극력반대하다가 전라도 남원으로 귀양살이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희를 지극히 아끼고 믿었던 태종은 비록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의 힘을 꺾지 못해 그를 귀양 보내기는 하지만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런 귀양살이 조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점을 황희의 조카에게 임금이 넌지시 일러 귀뜀해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임금은 황희를 신임하고 있었다.

이후 세종의 시대가 시작된 4년 후 태종은 세종에게 일러 황희를 다시 등용토록 권했다. 태종은 끝까지 황희의 바른 성품을 믿었고 또한 세종 역시 황희의 강직함과 충성을 믿고 있었 기 때문에 부왕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던 것이다. 황희 정승의 업적은 대부분 세종 시대에 남겨진 것으로 보아 능력 있는 인재등용에 귀감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해 관동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희는 현지에서 이를 살핀 뒤 그곳에 대나무 순이 나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술과 밥을 만들어 먹도록 권해서 기근을 피하게 하였다. 함길도지금의 함경도에 서도 그곳 특유의 밀과 같은 흙이 있음을 보고 실험을 해 본 뒤 그 흙을 떡과 국을 끓여 먹게 해서 급한 기근을 면하게 했다고 한다.

67세가 되던 해에는 평안도 도제찰사가 되어 순시를 하게 되었다. 이때 현지를 답사한 황희는 임금에게 약산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주와 연주 두 주를 합쳐서 대도호부를 두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임금은 조건 없이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였다고 적고 있다. 황희가 70세 되던 해 북쪽 야인들이 요동지방에서 잡아간 포로 5백여 명이 도망해 오자 야인들 이 앙심을 품고 우리 민가에 침입해 재물을 약탈해 가는 사건 이 일어났다. 이때 임금이 크게 상심하자 황희는 여러 대신과 의논하고 색다른 구제책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약탈을 당한 백성들에게는 3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청에서 옷과 양식을 대주고 친척들에게 보호를 부탁하고 만약 친척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이웃집 재산가들이 특별히 보호해 주도록 조치하자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조치였다. 아울러 약탈한 야인들에게는 먼저 우리에게 빼앗아간 사람과 말 그리고 재물을 변상하라 해서 듣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야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장수를 파견하여 이들을 격파한 것이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고 공을 치하하자 황희는 이에 만족하지 말고 평소 성을 튼튼히 하고 양식을 준비하여 불의의 사건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앞을 생각하는 신하의 간곡한 말을 권하 였던 것이다.

황희 76세 때 '행도천법'이라는 것을 시행

세종 20년 황희 76세 때는 '행도천법'이라는 것을 시행하였다. 이 법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평소 행실이 바르고 절의가 있는 사람, 뜻이 굳고 바른 말을 굽히지 않는 믿음이 큰 사람, 행실이 옳아 지방에서 널리 칭송을 받는 사람, 재능이 남달라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들을 각 관찰사들이 조사 천거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과거를 통해서만 인재를 쓰는 것을 지양하고 다른 방법으로 널리 인재를 구해 쓰는 색다른 방법이었다. 그러자 많은 반대자들이 생겼다. 그러나 황희를 신임한 임금은 이를 실행하 도록 하였다. 이렇듯 황희는 수많은 공적을 남겼다.

세종 이전에도 그의 나이 55세 때 태종 17'노비대한법奴婢 限法' 을 만들어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어 폐해가 많은 노비제도를 없애고 모두 공노비로 통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이어 '속육전續六典'을 찬하고 68세 때는 '오례의五禮儀' 를 지어 후에 우리나라 예서禮書의 효시가 되게 하였다. 황희는 정치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한편 시서詩書의 문장가로서도 이름을 높였다. 황희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전하였다. 그러나 야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장수를 파견 하여 이들을 적파한 것이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고 공을 치하하자 황희는 이에 만족하 지 말고 평소 성을 튼튼히 하고 양식을 준비하여 불의의 사건 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앞을 생각하는 신하의 간곡한 말을 권하 였던 것이다. 세종 20년 황희 76세 때는 '행도천법'이라는 것을 시행하였 다. 이 법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었다. 이 를테면 평소 행실이 바르고 절의가 있는 사람, 뜻이 굳고 바른 말을 굽히지 않는 믿음이 큰 사람, 행실이 옳아 지방에서 널리 칭송을 받는 사람, 재능이 남달라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 는 인물들을 각 관찰사들이 조사 천거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과거를 통해서만 인재를 쓰는 것을 지양하고 다른 방법 으로 널리 인재를 구해 쓰는 색다른 방법이었다. 그러자 많은 반대자들이 생겼다. 그러나 황희를 신임한 임금은 이를 실행하 도록 하였다. 이렇듯 황희는 수많은 공적을 남겼다. 세종 이전에도 그의 나이 55세 때태중 17'노비대한법奴婢 大限法' 을 만들어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어 폐해가 많은 노비제도를 없애고 모두 공노비로 통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이어 '속육전續六典' 을 찬하고 68세 때 는 '오례의五禮儀' 를 지어 후에 우리나라 예서禮書의 효시가 되게 하였다. 황희는 정치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한편 시서詩書의 문장가로서도 이름을 높였다. 황희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시서詩書의 문장가 황희

 

맑고 맑은 경포물에 초생달이 젖었는데

낙락한 한송정寒松亭에는 푸른 연기 끼었구나

아침 안개는 땅에 자욱하고 경포대 대숲은 푸르르다

티끌 세상에도 또한 해중 선경이 있구나

 

이밖에 황희가 지은 시조 몇 수를 더 보자.

 

대추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들으며

베 빈 그루에 게는 어이 나르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청조青鳥야 오도고야 반갑다 님의 소식

약수 삼천리 네 어이 건너 온다

우리님 만단정회를 네 다 알까 하노라

 

이렇듯 문학적 감성도 남달랐다. 시를 쓰는 방법인 수사법인 비유, 활유, 의인, 풍류, 대유, 등이 있다. 시인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효율적으로 잘 표현하는 기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의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아주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본다. 황희는 부모님에 대한 효성도 극진해 관복을 입고도 조석으로 나가고 들어감을 알려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고 사소한 일로 걱정을 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황정승이 평생에 한 번 오점을 남긴 사건이 있었다. 사재주부司宰主簿 태석균이 제주 감목관으로 있을 때 말 천여 두를 죽인 것이 후에 밝혀지자 이를 딱하게 여긴 황정승이 구해주려 한 것이 빌미가 되어 파직까지 당하게 된 일이었다. 늘 곧고 결백한 사람이 일개 주부에 불과한 개인의 일에 연루되어 좌정승 자리에서 파직되었으니 실로 옥에 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후 복직이 되었으나 어쨌든 그의 일생에 오점을 남긴 안타까운 일이었다. 황희는 세종 3187세 때 60년간 관직을 끝내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는 3년 뒤 문종 2145290세 정월에 병을 얻어 그해 2월에 한양 석정동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가 세종대왕이 승하한 다음 해이다. 그는 죽은 뒤 세종 묘에 배향되었으니 황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세종 임금과 함께 한 셈이다.

정관웅 본지논설주간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뉴스스크랩하기
기자이름없음 
만평섹션 목록으로
‘입양승속’하라.
하루 30분으로 건강하고 활...
이형문의 창가에서 63) 미...
이형문의 창가에서 84) 죽...
이형문의 창가에서 87) 계...
다음기사 : 김태중 기고- 마중물이 되어주는 장마님! (2024-06-25)
이전기사 : 이형문의 창가에서 112) 마음의 길 (2024-06-18)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이형문의 창가...
기고) 김종성 "강...
김현태 수필 "할...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 회원님의 레벨로는 알립니다 게시판리스팅 권한이 없습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알립니다 독자투고 기사제보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