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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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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 최초의병 ‘이남’을 기리며
김한얼기자의 현 사회 이슈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 최초의병 이남을 기리며

 

지난 8, 강진읍 강진아트홀에서 최초의병 이남(李楠) 선양사업회 창립총회강진·해남 원주이씨의 충절(忠節) 활동 학술발표회를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강진군과 해남군이 주최하였으며 최초의병 이남(李楠) 선양사업회가 주관하여 진행했다. 또한 강진군, 해남군, 강진문화원, ()호남고문문헌연구원, 한국구비문학회, 남도민속학회에서 이번 행사를 후원했다.

이 행사는 전남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남도 의병 역사박물관건립에서 촉발됐다. 남도의병 정신을 기리는 역사박물관은 2025년 하반기에 개관 예정으로 나주에 조성 중이다. 이강 회장(최초의병 이남(李楠) 선양사업회 회장)은 이 날 환영사에서 이남 장군을 비롯한 전남 지역 원주 이씨들이 국가의 위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순국함으로써 절의를 들어내었다.” 라고 말하며 “16, 17세기 양란의 국가적 대 환란기에 강진,해남 지역 원주이씨들이 펼친 충절 활동을 제대로 살피는 것은 한 집안의 임무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밝혔다.

이 날 행사에는 서순철 강진 부군수, 김보미 국회의장, 김승남 전 국회의원, 박종민 문화원장을 비롯한 수 많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강진·해남 원주이씨의 충절(忠節) 활동 학술발표회는 지난 8, 오전 11시에 열린 창립총회와 동일하게 강진아트홀에서 오후 3시에 진행됐다.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김만호(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김창수(전남대학교 교수)의 발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 날 행사에서는 김덕진 교수의 이남(李楠)의 생애와 을묘왜변 거의 · 순절, 김만호 연구원의 임진왜란기 원주이씨 강릉공파 일문의 충절활동, 김창수 교수의 조선사신의 대() 후금 정세 인식과 정보수집 - 이준(李浚)심행일기(1635)를 중심으로가 발표됐다.

이번 발표의 핵심주제는 강진,해남지역 원주이씨의 충절(忠節)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참석자들은 을묘왜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기를 비롯한 16~17세기 조선의 운명을 가로지를 혼란스러운 시기에 원주이씨 가문의 인물들이 어떤 숭고한 희생과 충절을 보였는지 주목했다.

 

다음은 김덕진 교수의 발표 이남(李楠)의 생애와 을묘왜변 거의 · 순절을 요약한 글이다. 글 일부분을 요약하자면, ‘이남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민관합동까지 진행하여 달량진성에 포위된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구성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도 분전분투하여 순절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남을 제외한 인물들은 실록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남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되거나 일부만 남아있다는 점을 보아 우리 후손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인물들에 대해 제대로 대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을 반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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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李楠)의 생애와 을묘왜변 거의 · 순절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1. 머리말

해남에서 살던 원주이씨는 16세기 전반에 현재의 강진군 금당리(金塘里) 금당 마을로 들어왔다. 강진 입향조는 무과 급제 후 내외 관직을 거치고 을묘왜변 때에 순직하여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키다)하여 순절한 이남(李楠, 1505~1555)이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금당마을에 세거하면서 곧바로 강진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그들이 짧은 시간 안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왜변, 왜란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솔선수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명망가들과 교유하여 학문을 연구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에 진출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관내 유력 가문과 혼맥을 맺고 강진 향안(鄕案)에 입록하고 임란 창의록에 입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약 결과 강진 세거 원주 이씨는 활발한 활동과 함께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나왔다. 현재 주목할 만한 논저 3권의 책과 10편의 논문이 찾아지고 있다. 이러한 정도면 시군 단위의 문중 연구에서 가히 압도적 성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강진 입향죠이면서 을묘왜변 때 거의를 하여 왜구를 막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이남에 대한 기록이 매우 엉성하여, 그에 대한 연구성과가 없는 점은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여기에서는 비록 자료는 소략하지만, 이남의 생애와 을묘왜변에서의 활약 및 그 의의를 알아보겠다. 특히 군역 의무자가 아니고 전직 관리 민간인이 거의하여 순절한 점은 아직까지 그 유래를 찾기 힘들고, 타의 모범이 되어 향후 국란극본의 큰 원동력이 되었던 점을 부각해보고자 한다.

 

2. 이남의 생애

1) 해남에서 강진으로 이거

원주이씨는 강원도 원주의 토호로써 고려 목종(997,1009 재임)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원주백에 봉해진 이산우를 관조로 한다.

이후 원주이씨는 분화되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이관조로부터 14세손인 이분이 원주에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거하였다.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15세손 이영화(?~1487)는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따가, 광주에서 바닷가 해남 마산면 산막리로 남하하여 은거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후손들이 전라도에서 터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산막리 외에 그 인근의 화내리, 맹진리, 외호리 일대 및 주변 고을의 곳곳에 분포하는데, 그들을 강릉공파라고 한다.

이남은 강릉공파 막내인 여섯째 이지건의 아들로 해남에서 강진 금여리로 이거하여 원주 이씨 강진파으의 시조가 되었다. 금여리는 현재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 금당마을이다.

 

2)무과 급제, 무장현감 역임

이남(李楠)1505(연산군 11)에 해남에서 이지건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간(中幹)이다. ‘원주이씨세보에 따르면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이남은 조계문의 딸 도강조씨와 혼인했다. 도강은 고려시대 때 도강군이라는 독립 고을이었꼬, 도강조씨는 도강의 토성(한 지역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유력한 성씨) 가운에 하나다.

도강군은 1417(태종 17) 탐진현과 통합되어 강진현이 되어 오늘날 강진군으로 이어진다. 이남이 옮겨 들어온 성전면은 옛 도강군 영역이다. 이남은 도강 지역의 유력집안인 도강조씨와의 혼인을 계기로 강진으로 이거하였을 것인데, 그때를 문중에서는 1525(중종 20)으로 보고 있다.

이남은 20대 중반인 1531(중종 26)에 무과 급제하였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 또한 무과 출신이다. 증손자 가운데도 무과 출신자가 여럿 있으니, 이때까지 원주이씨 강진파는 무인 집안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증손자 이빈이 소과·문과를 통해 문관직을 역임한 이후부터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며 조선 사대부의 전형적인 길을 따르게 된다.

행장이나 자료가 없어 이남이 급제 후 어떤 관로를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사헌부 감찰, 광양현감, 무장현감 등으로 역임한 바가 있다는 점만 알려지고 있다. ‘광양읍지에서는 이남을 포함한 초기 현감의 재임시기가 미상으로 적혀 있으니, 언제 광양현감을 역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무장읍지에 이남이 임자년 1552(명종 7) 2월에 와서, 갑인연 1554(명종 9)“에 파거(罷擧)하였다 적혀있다. 무장의 유생 안서순과 박인필이 상소하여 민간의 폐해를 전달하고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하는 모양을 그려 올렸으니, 큰 기근이 들었다. 이를 볼 때 기근 때의 구휼 부실과 기근으로 인한 세금 미징수 등으로 이남은 연말 무렵 무장현감에서 파직되었을 것 같다.

이남의 셋째 아들 이억복 1567(선조 즉위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이억복의 무과 방목에 부친 이남의 품계가 통훈 배부, 관직이 행부장현감으로 적혀있다. 이남의 직함은 전 무장현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통훈대부란 정3품 당하관이고, 무장현감은 종 6품 자리다.

이남은 정 3품 당하관으로 자신의 품계보다 낮은 종6품 관직에 제수되었다. 3품은 당상관 승진을 앞두고 있는 고위급이다. 이러한 인물이 무과에 급제한지 2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 3품 통훈대부에 그치고 있었다는 점은 의문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이 권신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증종 말기 김안로가, 명종 초기는 윤원형이 권신으로서 권력을 정횡하고 있던 시기다. 이를 보아 원주 이씨 사람들은 권신과 가까이하기에는 먼 집안인 것 같다.

3. 을묘왜변과 거의 및 순절

이남은 을묘왜변 직전 1554(명종 9) 말에 무장현감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이듬해 1555(명종 10) 511, 왜구들이 대규모 선박을 이끌고 영암 달도 앞에 출몰하였다. 달도는 조그마한 섬으로 남쪽이 완도이고, 북쪽이 달량이다. 이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달도 바로 앞에 있는 달도로 상륙하여 전라도 내륙으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을묘왜변이었다.

이 왜변의 기획자는 쓰시마 도주로 알려졌다. 조정에서 왜인들이 3포에서 난동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세견선(쌀을 얻어가는 배)의 척수를 50척에서 25척으로 줄였다. 쓰시마는 세견선 척수가 들어 경제난을 겪었고,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된다. 도주는 옛 조항을 무력으로 회복하려는 계책을 꾸민다. 도주는 을묘왜변을 일으키기 앞서 부산포에 서계를 보내 근처 섬의 배 수백척이 순풍을 만나게 되어 귀국하게 될 것이라고 공갈을 쳤다.

왜구들은 규슈에서 바다를 건너와서 달량 포구 앞바다에 진을 쳤다. 5월에는 남동풍이 불어 규슈에서 전라도 남부까지 한달음에 올 수 있따. 그들이 타고 온 선박의 숫자에 대해서는 수십 척, 60여척 척, 70여 척, 1백여 척 등이 보인다. 출몰한 왜구의 숫자에 대해 6천 명, 1만 여명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70여 척과 6천여명으로 나온다. 1척 당 1백명이 승선한 셈이다.

그들은 진격의장애물인 달량진성을 포위한다. 그동안 왜선 규모는 많아봐야서 20여척에 불과했지만, 이번은 무려 70척이다. 작심하고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영의정 심연원이 다음 아뢴바에 따르면 이전과는 달리 견고하고 빠른 배를 타고 왔으며, , , 방패, ,호각, 깃발 등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교한 총통(화약으로 쏘는 화포) 또한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달량은 이러한 왜구들에게 6겹으로 포위되었다.

 

3) 달량 외각에서 장렬하게 순절하다.

 

-변협이 달량이 포위된 것을 듣고서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는데, 전 무장현감 이남과 힘을 합쳐 접전하다가 적에게 격파되어 이남은 죽고 변협은 패배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우도 수사 김빈과 진도군수 최인은 변협이 패한 것을 알지 못하고 어란포에서 와 구원하다가 역시 패하였는데 이날 달량이 함락됐습니다. (명종실록, 18, 명종 10521, 갑인)

변협과 이남은 구원군 3백 여명을 이끌고 왜구에 맞섰다. 전라병사는 장흥부사, 영암군수와 함께 달량진성 안에 있고, 전라우수사는 진도 군수와 함께 어란진성 멀리 떨어진 곳에서 쳐다만 보고, 광주목사와 강진현감은 달량진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무원고립의 상태에서 변협과 이남은 외로운 전투를 벌여야했다.

달량진성 접전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전투였다. 을묘왜변으로부터 30여 년 전 대마도 출신이 아닌 왜인이 12척의 선박으로 달량을 공격하였는데 조선말을 잘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이들은 조선 해안가에서 납치해 간 도서, 연해인이다. 이들을 정보원으로 삼고서 지형지물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포를 쏘아댔으니 군사력 면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외각의 구원군의 접근도 차단했다.

처음으로 겪어본 민관 합동 작전이었지만 아군은 적에게 격파된다. 실록에서처럼 이남은 장렬히 전사하고 변협은 간신히 빠져나왔다.

달량진성에서 외각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담고 있다. 하나는 이 전투가 달량진성 구원전으로 현재 유일하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민간인으로서 참전한 이남이 최초로 확인되는 의병이라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의병으로서 순절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때 이남은 친족이나 노복을 이끌고 참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민간인이 자기 마을이나 어장을 침입한 왜구와 맞붙어 싸운 적은 있었지만, 전란 때 민간인의 거의 · 참전 · 순절은 지금까지 좀체 보기 드물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해남현감 변협이 해남읍성 승전후 자기 고을의 충순위 임현령을 보내서 보고한 것을 토대로 편찬된 실록 기사(기록)만 남았고 현재 다른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실록 기사는 해남과 변협을 중심으로 쓰여지고, 이남 관련 내용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록은 경향은 실록 곳곳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모든 사실관계를 이남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안하고, 오로지 변협을 중심으로 이끌고 있다. 현직관리도 아닌 전직 관리 민간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격한 숭고한 모습은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한 해답으 복잡하다. 사림(士林)은 명종 대의 척신정치를 타파하고 선조 즉위와 함께 자신들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들이 편찬한 명종실록은 척시노가 결탁한 관료들의 부패가 두드러지게 보였을 것이고, 민간인의 자발적 희생은 그 뒤였을 것이다.

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나태나 주의력 부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호남절의록에 을묘왜변의 사실을 설명한 을묘의적편이 있는데, 여기에는 양달사와 백세례 2인만 입록되어있다. 양달사는 영암읍성 전투에서 관군과 함께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이고, 백세례는 달량진성 전투에서 자기 고을 원님 한온과 함께 죽은 인물이다. 이남과 양살다, 백세례의 비교에서 후손이 무엇을 해왔는가에 대한 해답은자연스럽게 찾아질 수 있겠다.

 

(......)

 

5. 맺음말

무과 급제자 이남은 무장현감을 역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달량진성에 포위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해남현감 변협과 전 무장현감 이남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해 3백 군병을 조집하였다. 그 가운데 1백명은 1변협이 모집한 해남 정규군이었다. 나머지 2백명은 이남이 모집한 의병이었으니, 이남은 의병장으로서 민관 합종작전을 펼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인물이 되었다. 변협과 이남은 달량진성 외곽에서 힘을 합쳐 왜구와 접전을 펼쳤으나, 그만 격파되어 이남은 목숨을 잃고 변협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싸. 이후 왜구들은 침략 3일만에 달량진성을 무너뜨리고 전라도 서남부 일대를 초토화 시키고 말았다.

왜변이 끝나고 정부는 희생자에 대한 포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와 관련하여 전라도 전망인·피살인을 조사한 결과 507명으로 파악되었다. 그 가운데 전투 중에 죽은 사람인 전망인은 167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이남이 제 1번으로 포상을 받았다. 전투 금품은 쌀 · · 종이 · 상 등이었고, 우대조치는 후손을 서용하고 재수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포상을 토대로 후손들은 조상 이남에 대한 증직을 내려 받았지만 사우 · 정려 · 시호 등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취재: 김한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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