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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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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다산실학연구원 제 28회 학술대회 개최
전라우도 학문전통과 강진과 17세기 이후 강진의 사상적 지형을 돌아보며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주관 제 28회 학술대회 개최

  

-전라우도 학문전통과 강진과 17세기 이후 강진의 사상적 지형을 돌아보며-

 

 

지난 24일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원장 김성보)은 지난 24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제 28회 강진다산실학연구원 제 28회 학술대회를 강진아트홀 2층 소공연장에서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강진군이 후원하고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이 주관했다.

 

100여명의 강진군민 및 연세대학교 대학원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성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장은 개회사를 이번 학술대회는 강진학정립을 위한 다섯 번째 시도로 강진의 사상적 변화와 발전 양상을 추적해보고자 합니다. 강진원 군수님을 비롯해서 여러 의원님들과 강진 군민 여러분, 이번 학술대회에서 좌장을 맡은 고석규 목포대학교 총장을 비롯해서 모든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이번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김국혼 다산박물관장은 축사를 통해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강진의 역사 문화적 역사를 정립하는데 알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남도답사 1번지 강진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며 모든 내외귀빈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번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행사 사회는 신지영(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이 맡았다. 1부와 2부의 발표가 끝나고, 학술대회 좌장 고석규(목표대학교 총장)을 중심으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고, 이후 폐회식 및 기념촬영이 진행하고서 끝났다.

 

1부 첫 번째 순서로 조선후기 강진 지역의 실용학풍 추이와 특징 -과학기술을 중심으로이라는 제목으로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이 발표를 진행하고, 홍해뜸(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 연구원)이 토론을 맡았다. 두 번째 순서는 강진본 동남소사의 다산 정약용이라는 제목으로 김용흠(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 발표를 진행하고, 이선아(전북대학교 이재연구소)가 토론을 맡았다.

2부 첫 번째 순서로 강진 선사들과의 교유를 본 다산의 유불관이라는 제목으로 백민정(카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발표를 진행하고, 이영호(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 두 번째 순서는 다산의 시문을 통해 본 강진의 농업, 농촌 농민이라는 제목으로 염정섭(한림대학교 사학전공 교수)가 발표를 진행하고, 최윤오(강진다산실학 연구위원장)이 토론을 맡았다.

 

다음은 발표자들이 발표한 내용의 요약이다.

 

1부 첫 번째 발표자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교수)조선후기 강진 지역의 실용학풍 추이와 특징 -과학기술을 중심으로발표에서 18~19세기에 한반도 남부 전라도 지역에서 과학기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거나 관심을 경주한 실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고 밝히며 역사지리학, 지리학, 수리학, 천문학, 수학, 조선업, 수레, 어류학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리만복의 실용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있었음을 알렸다. 또한 전남 지역은 수도권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실학 연구가 왕성하게 펼쳐진 곳이었으며 이 가운데 강진 출신자가 가장 많았고 연구자 수나 연구분야 측면에서 가히 압도적이라며 강진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궁금해진다고 밝혔다.

첫째로 강진은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제주도와 한반도를 왕래하고 남해와 동해 서해를 연결하는 중심지임에 주목했다.

둘째로 강진은 전라도 육군 사령부 전라병영이 있었다는 점이며 상비군이 상시 주둔하면서 전라도 전 군현의 군정을 책임지고 진상물을 바쳐야하는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중심지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셋째로 완도, 고금도, 신지도, 청산도 등의 섬이 완도군이 창설되는 1896년에는 강진에 소속되어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각 섬들에는 수군진이 철시되어 있었고, 진장이 오가고, 관용과 군용의 수요가 있었다.

넷째로 강진 본토와 부속도서가 자주 유배지로 선정되거나 경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강진에는 남인계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정배되었고, 소론계 이상과가 신지도에 정배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론계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갈 때 강진에 머물렀는데 그로 인해 남강서원이 19세기 초반에 건립되기도 하였다. 유배인 본인 외에 그의 가족,지인,하인들이 강진을 경유했으니 인적교류 측면에서 무시못 할 지역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지역적 특징으로 인해 강진은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여러 학맥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중에 강진 사람을 사로잡은 학문은 고담준론이 아니라 실용분야였다. 그렇기에 이의경, 이여박, 이강회, 이청등을 중심으로 서학, 상수학, 수학, 수리학, 수레학, 조선학, 천문학, 어류학에 대한 연구가 진전될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이러한 연구와 학문들을 토대로 이전의 실용학풍이 구한말과 일제시대 당시 애국계몽운동으로 진화하였다고 밝혔다.

강진에서는 강진 최초의 근대학교가 1906년에 개교되었다. 이 금릉학교에 설립에 도움을 주거나 졸업한 이들은 강진 지역 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하였다. 이들 중 국채보상운동, 청년운동, 3.1운동을 주도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계몽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급진적인 움직임들도 있었다. 대구면 출신 윤세현이 동학지도자가 되어 강진,완도,진도,영암등 6개 군을 아우르는 농민군을 이끈 경우도 있었다. 당시 윤세현 뿐만 아닌 해남윤씨 족원 16인이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했음이 확인되었다. 16인은 대구,칠량면 출신으로 윤세현의 영향 아래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에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강진에 양반,이족,장교층으로 구성된 수성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남윤씨 중심의 동학농민군이 결성되었던 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라 밝혔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분위기는 훗날 일제 강점기에 수동리 윤가현, 윤순달에 의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군동면 출신의 오기호와 도암면 출신의 윤주찬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을 처단할 자신회를 1907년 비밀리에 조직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들은 자금을 제공하거나 호남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밝혔다.

 

1부 두 번째 발표자 김용흠(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강진본 동남서사의 특징과 다산 정약용발표에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는 여느 유배인과 달리 그 지역에서 지역과 신분, 유교와 불교를 뛰어넘어 제자를 양성하고 딸을 시집보내어 외손자를 제자로 삼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고 밝혔다. 또한 사제관계를 넘어서 지역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강진 지역과 관련된 여러 저술에 관여하였는데, 강진본 동남소사가 그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동남소사는 요약하자면 1589년 정여립 옥사에서 시작된 일련의 옥사와 관련된 기록이다. ‘여유당전서보유에 수록되고, 최근에는 당론서로 분류되어 번역본이 간행되었다.그러나 정약용은 여유당전서 정본화 사업에서 정약용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그러나 동남서사전체가 정약용의 저술은 아니지만 그 책에 간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되지 않았다. 정약용은 강진본 동남소사를 통해 타 지역과 다른 다양한 기록들을 포함했다. 요약하자면 정약용은 강진본 동남소사를 통해 과거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론적 입장을 통해 남인의 당론을 제어하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당시 정여립 역모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 죽임당한 이발 형제들의 억울함을 강조하여 당파적 대결의식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이발 형제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모범으로 삼아서 본받아야한다는 움직임으로 전환시켜 역사적 증오와 분노를 희석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정약용의 노력은 훗날 이발과 이길 형제를 기리는 수암사가 건립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2부 첫번째 발표자 백민정(카톨릭 대학교 교수)강신 선사들과의 교유로 살펴본 다산의 유불관발표에서 다산 정약용과 강진 지역선사들의 교유를 통해 불교에 대한 다산의 생각, 그리고 유교와 불교의 차이에 대한 다산의 관점을 살폈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오기 이전부터 다산의 고향 인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조곡산에 위치한 수종사와의 인연을 통해 불교와 이미 접한 바 있다. 다산은 두 편의 시를 발표하여 수종사에 머물던 감회를 표현하기도 했다. 사찰 머물던 순간의 고요한 평정심이 삶의 고비마다 다산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대부로서 학문적으로 불교를 비판하였지만 이러한 유년에 불교와 접한 경험들이 선승들과 깊이 교류하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감화와 즐거움을 얻는 것에 큰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산은 자신의 심정을 불교적 언사로 표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산은 1811년 자신의 형님 정약전에게 보낸 서신에서 불가의 교법과 선법을 언급하며 교법을 중시하는 경사라도 말년에 이르면 좌선을 희구하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도 그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좌선의 어려움이 경전 연구보다 갑절이나 크기 때문에 자신의 심력이 그에 못 미칠까 우려했다. 다산은 강진이 오히려 후하고 높은 삼청선계인데 이곳을 버리고 네겹 아비지옥에 몸을 던질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냐고 반문하는가 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 이곳이 자신이 묘지로 쓸 평천장이며 자신을 살아가게하는 탕목읍이라고 묘사했다.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도착해서 처음만난 스님은 해일이었다. 다산은 해일선사를 만나 그를 전송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이 글에서 다산은 승려들의 육바라밀 세계를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다른 한편 구태여 불가에 빠질 필요가 있느냐는 듯 속을 떠나 진을 추구하는 것의 허무함과 망념을 표현하여 거리를 두려는 유학자의 시선도 담았다.

강진 유배기에 다산이 인간적 유대감을 나눈 승려는 단연 연파 혜장 선사였다. 다산은 1805417일 백련사에서 혜장 선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다산은 혜장의 뛰어난 재주와 식견에 감탄했으나 대신 불법의 평등안을 거론하며 나와 남을 구별짓지 말고 낮은 자세로 처신할 것을 혜장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혜장의 재주와 식견이 너무 뛰어나 타인이 공격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혜장은 스승도 없이 주역에 통달했는데 다산은 이를 가상히 여겼다. 다산은 혜장에게 시경,’서경‘,’주역을 설파했고, 혜장은 반대로 화엄경‘,’능엄경‘,’원각경등의 세계를 펼쳤다. 다산은 혜장에게 유교를 알리면서도 불경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 사람은 주역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다산은 여러 불교 인사들의 교류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으나, 반대로 다산이 추구하는 인간의 고유성, 그리고 인간의 선택과 의지 작용을 위배한다는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다산에게 있어 인간은 상제와 부모에게서 영명한 마음과 육체를 부여받은 한시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선택과 의지작용에 따라 선악을 판별하는 주체적인 윤리학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2부 두 번째 발표자 염정섭(한림대학교 사학전공 교수)다산(茶山)의 시문(詩文)을 통해 본 강진의 농업, 농촌, 농민발표에서 다산 정약용의 정치,경제,역사,지리등 여러 분야에 걸쳐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음을 언급하면서 저자의 일생을 1기에서 4기로 나누어 분석했다.

다산 정약용은 탐진촌요이십수’, ‘탐진농가십수’, 그 이외에 탐진어가십장’, ‘장기농가십장’, ‘화소장공동파팔수-차운경세유표’,‘목민심서에 담긴 논의를 통해 위정자이자 학자로서 농업, 농촌, 농민의 모습을 표현하거나 해결법 및 자신의 생각을 담갔다.

가령 정약용의 탐진농가십수는 농법,농업기술의 진면목을 거의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채워져 있다.’탐진농가십수의 제 1수는 다경이라는 농법의 증여한 측면을 적시하고 있다.

 

납일에 훈풍 불고 눈도 정히 개었는데 / 臘日風薰雪正晴

울 가에는 이러쯔쯔 쟁기 끄는 소리로세 / 籬邊札札曳犂聲

머슴놈 게으르다 주인영감 호통치며 / 主翁擲杖眞傭懶

금년 들어 이제 겨우 두벌갈이 하느냐네 / 今歲纔翻第二畊

 

위 시는 납일에 쟁기질하는 일꾼을 야단치는 전주를 묘사하면서 금년에 이제 겨우 두벌갈이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다산은 이것 외에도 다양한 시들을 통해 농촌과 농민들의 모습을 담았으며 그들의 사정 및 농법과 농업기술등 다양한 면모에 주목했다. 농민과 농사를 근본으러 여기는 과거의 조선 사람 만큼이나 농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농민들의 애환과 삶을 진심으로 이해했으며 그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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