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이야기
김현임(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원)
무심코 틀어두었던 아침 텔레비전이다. 그런데 부자비법을 알려준다는 주제에 놀라 화급히 채널을 돌렸다. 이웃이 돌린 떡 접시까지 돈으로 환산해 기록하는 알뜰가계부의 주인공, 언젠가 읽은 여성지 수기의 그 불유쾌한 기억 때문만도 아니리라. 경제에 보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나의 예민한 거부반응이다. 서점가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재테크 비법, 몇 년에 얼마 모으기 따위의 경제전략서 아닌가. 한데 그 코너 서가는 오물 피하듯 빙 돌아다니는 나이고 보면 목하 황금만능 시대에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어쨌든 난 부자비법에 소질도 없고 딱히 귀 기울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올해로 결혼 5년차에 접어든 아들, 그야말로 자수성가로 시작해 당당히 수도권아파트의 전세자금을 마련했으니 내심 치하할 만하다. 그에 얻은 자신감일까. 대뜸 기한까지 정하며 집장만을 목표로 열심히 뛰겠다 선포했다. 아들의 그런 원대한 가계경제계획조차 귓등으로 흘려듣는 어미이니 내 허술한 경제관을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너도나도 지갑을 꽁꽁 여미는, IMF 때보다 힘들다는 아우성이 창궐하는 요즘이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절약과 근면이 낸다 했다. 무시무시한 세파를 헤쳐 나갈 아들의 전도가 은근히 걱정되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보는 역사 속 자린고비 일화다.
조륵은 충북 음성 출신의 구두쇠다. 자신의 집 간장을 발에 묻힌 파리를 쫓아 무려 200여리를 뛰었다던가. 생선, 고기는 상에 올린 적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웃들이 작당하여 조륵의 마당에 생선을 놓아두고 동태를 살폈다. 생선을 발견한 조륵은 깜짝 놀라 ‘밥도둑이 들어왔다’는 소릴 지르며 바깥으로 생선을 내던졌다. 생선을 먹으면 밥맛이 당겨 밥을 더 먹게 되니 생선이야말로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전국에 알려진 그의 구두쇠 비법을 전수 받으려고 찾아온 이가 허름한 그의 집을 보고 먼저 놀랐다던가. 불기라고는 없는 구들 갈라 터진 방에서 추위와 싸운 다음 날이다. 밤새 바람이 새어드는 문풍지를 바른 창호지를 자신의 것이라며 뜯어가는 전라도 구두쇠를 허둥지둥 뒤쫓아 온 조륵의 말은 기가 막힌다. 종이는 분명 당신 것이지만 밥풀은 자신의 것이니 한 톨 남김없이 떼어놓고 가라했다니! 그 대목도 그렇지만 평소 체면, 예의, 신용 이 세 가지를 철저히 배척했다는 조륵, 그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를 읽는 내내 눈살 찌푸려지는 삽화가 적지 않았다.
일찍이 돈 모으는 창고라 하여 錢舍, 혹은 그가 속한 고을 절반을 살만큼의 재력가라 하여 賈半州라 부르던 중국의 유명한 자란고비가 가원외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의 관 값이 아까워 자신의 관으로 소구유를 쓰라 명했다. 만약 크기가 안 맞거든 자신의 시신을 토막 내어도 좋지만 행여 딱딱한 뼈에 날 닳을 것이 염려되니 도끼만큼은 반드시 이웃 것을 빌려서 써라 아들에게 신신당부 유언했다. 과히 조륵과 막상막하, 난형난제, 용쟁호투다. 다만 놀라운 것은 그 쪼잔하기 이를 데 없는 구두쇠 조륵이 영조로부터 정 3품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는 것, 또한 후세인들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는 게 기이하지 않은가. 지금도 회자되는 너무도 유명한 일화 아니던가. 천장에 매달은 굴비를 집 식구가 두 번 쳐다보자 아낄 줄 모르고 짜게 먹는다며 호통쳤다는, 비록 입을 댈 수 없을 만큼 짠 굴비일망정 조상의 제사상을 위해 제 천성까지 어겨가며 구입한 그 극진한 효성 덕택이냐고?
무려 삼천 명이 넘는 식객들로 넘쳐나던 맹상군의 저택이다. 그런데 그가 파직되자 대문에 새잡이 그물을 칠 정도로 사람들의 출입이 한적해졌다. 이윽고 맹상군이 재상으로 복직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시 구름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이다. 그 광경에 맹상군이 신세 한탄을 하자 어진 이는 이렇게 충고한다.
“돈이 있고 신분이 높으면 사람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신분이 천하면 친구가 적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새벽에는 어깨를 부딪치며 앞을 다투어 문으로 들어갑니다만, 해가 저문 후면 시장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석양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이익이 석양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기 때문입니다.”
엄청 난 재산가임에도 門前雀羅를 면치 못하던 조륵은 60세 환갑날, 이를테면 생사의 회귀점에서 이웃들을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반신반의하며 모인 이웃들, 그 자리에서 조륵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토록 피나는 자린고비의 행태를 보인 연유를 눈물을 흘려가며 설명했다. 이후 그의 씀씀이는 놀랍도록 헤퍼졌다. 때마침 영호남을 강타한 흉년을 비롯, 어려운 이웃의 구휼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푼 것이다. 자린고비의 어원이 제사 때 쓰는 지방 종이를 기름에 절였다 다시 쓰는 절인 고비의 구두쇠를 이르는 말이라던가. 물론 조륵의 비석 명은 자린고비가 아니라 ‘慈仁高碑’다. 부디 앞으로 모을 아들의 재물이 이웃의 눈총 받으며 모은 소금기 흐르는 재물이 아니기를, 경제 까막눈 어미의 간절한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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