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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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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이 낳은 법조계의 거목, 현공 윤재식 대법관을 추모하며

.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뿌리의 길, 강진(康津)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 정호승, 뿌리의 길

 

아버지와 강진에 대해서 제가 아는 바는, 강진군 강진읍 송전리 888(지금은 화전발산길 2813)에서 태어나셨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위 주소를 본적지(지금의 등록기준지)로 두셨습니다), 강진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셨으며(영랑 김윤식도 이 학교의 전신 강진 보통학교 졸업), 동 학년에서 유일하게 광주서중에 합격하여 광주로 유학을 가셨다는 점, 2005년 퇴임 이후 재경강진향우회로부터 자랑스런 강진인상을 수상하셨다는 점 정도입니다. 아버지는 재판과 법원 일로 늘 바쁘셔서 자식들과 살갑게 대화할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하셨고, 저희 남매들에게 강진에 대한 추억에 대해서 말씀하실 기회도 좀처럼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36년간 봉직했던 법관직을 퇴임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신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길랑-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이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병마가 갑작스레 찾아들었습니다. 특별한 전조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레 쓰러져 응급실로 가신 후로부터는, 법관시절과 마찬가지로 변호사 시절에도 기록을 깐깐하게 검토하고 상고이유서를 직접 쓰시던 완벽주의를 내려놓으셔야 했습니다. 정신은 맑았으되 거동이 어려워져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듯 하셨을 긴 세월의 외로움과 고독을 제가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만 14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가족의 중심을 지켜내실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묵묵히 보살피고 헌신하신 어머니 권효영 여사의 공덕(功德)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와병은 부수적으로 저와의 대화의 시간도 전보다는 많이 늘려주었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레 속 깊은 얘기들을 나누지는 못했고, 저도 당면한 인생의 숙제들을 풀어내야 하는 가장 바쁜 시기였기에 안부를 여쭙는 이상의 깊은 소통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솔직히 제가 자식이라고 해서 과연 아버지를 얼마나 잘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부터라도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새롭게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여행의 출발점은 모름지기 아버지를 낳고 길러낸 남도의 끝자락 강진(康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재판의 한 길, 대법관으로서의 유산(legacy)

 

올곧은 양심으로 시대의 기후를 바꾼

大法官 (1999-2005) 여기 잠들다

 

아들로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지난 9월 초 아버지 묘비에 새긴 문구입니다.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정치권 등 외부의 부당한 영향에 휘둘리지 않고 올곧게 법관의 양심을 지키고자 평생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묵수(墨守)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기후(climate of the era)를 예민하게 감지하여, 이를 판결에 녹여내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마중물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 내셨습니다.

1942년생(실제 41년생)인 아버지는 19704월 춘천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하여 200510월 대법관을 퇴임하기까지 36년에 달하는 세월을 법관으로 봉직하셨습니다. 그 후 개인변호사로 또 법무법인 민주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셨지만, 이 중에서 아버지를 한 마디로 규정짓는 정체성은 법관이고 그 정점은 대법관(1999-2005)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위의 높음에만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법원 종합법률정보 판례검색을 통해 보면, 대법관 6년 동안 관여한 전원합의체 사건은 총 62건이었고, 이 중 해당 사건의 판결문을 집필한 주심 사건이 13, 소수의견(반대의견, 별개의견)을 내신 사건이 10건이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13명의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아버지께서 얼마나 열심히 재판에 심혈을 쏟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직 시절 아버지께서 전원합의체 합의과정의 보람과 고뇌를 얘기하셨던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마치 수험생, 고시생과 같이 단순화된 생활을 반복하셨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법원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하시고, 퇴근할 때 기록을 보자기에 한 보따리 싸오셔서 저녁 먹고 보시고, 좀 일찍 눈을 잠깐 붙이셨다가 이른 새벽에 깨서 한참동안 또 일하시고, 늦은 아침에 한 시간 남짓 눈 붙였다가 출근하시는 패턴으로 매일 기록보고 판결문 쓰는 것에만 몰두하신 기억이 납니다. 주말에 혼자 등산을 다니시거나 가끔 옛 친구 분들과 바둑으로 소일하시는 외에는(이분들은 주로 강진 초등학교나 광주일고 동창들이셨던 것 같습니다), 취미도 휴식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것이(이는 길지 않았던 개업 변호사 시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퇴임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게 된 주된 원인은 아니었을까 추정해보게 됩니다.

작고 후 아버지의 별세소식을 전한 언론기사들에서는 대부분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한 판결(대법원 2004. 7. 15 선고 20042965 전원합의체 판결 [병역법위반] 주심 및 별개의견 집필)과 여성의 종회 회원 자격을 인정한 판결(대법원 2005. 7. 21 선고 20021178 전원합의체 판결 [종회회원확인], 아버지는 이 판결 주심은 아니었으나, 76의 팽팽한 구도에서 아버지가 다수의견에 속하심으로써 종래의 판례를 변경하여 남녀차별을 개선하는 기폭제가 된 점을 평가해준 것으로 보입니다)을 대표적인 판결로 언급하였습니다. 이 두 판결이 우리 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군인에 대한 공동불법행위자의 국가에 대한 구상 문제를 종래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와 달리 새롭게 해석한 판결(대법원 2001. 2. 15 선고 9642420 전원합의체 판결 [구상금]) 등과 같이 언론이나 국민에게는 덜 알려졌지만 이후 법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판례들이 많았고, 이는 모두 아버지가 재임기간 촌음을 아껴가며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형극(荊棘)의 금자탑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재판의 한 길로 매진하여 쌓아올린 이와 같은 대법관으로서의 유산은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재평가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법의 정치화와 사법행정의 관료화 등이 문제로 떠오르고 새삼스레 좋은 재판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아버지께서는 묵묵히 좋은 재판에 진력하며 법관은 오직 판결로만 말한다는 오랜 금언을 행동으로 실천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투병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못하시게 되면서 이러한 유산이 덧없이 묻히는 것이 안타까워, 수차례 당신께 회고록이든 판결문집이든 펴내셔서 하고 싶은 말씀을 남길 수 있도록 조력하고자 했지만, 당신은 번번이 거절하시곤 했습니다. 이는 허황된 말의 성찬이 오히려 본질을 분식(粉飾)함을 경계한 당신 방식의 올곧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 슬픔 속에 진 모란이 새로 피어날 찬란한 봄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법관이셨습니다. 법관으로서 실정법을 해석, 적용하여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법관으로서 실정법을 유보나 이의 없이 수용하시지만은 않았고, 그 법률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랬기에 여성에게 종중회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에 설 수 있었고,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다수의견은 물론 보충의견도 집필하시며 2004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대체복무제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특정한 정파나 도그마에 복무하지 않았고, 열린 자세를 견지하면서 사안의 본질을 천착하고자 하셨습니다. 강진인이고 호남인이었으되, 지역의 이익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국가의 대의를 늘 염두에 두셨습니다.

저는 대학 신입생 때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님의 문학개론 수업을 수강했었고, 문학에 대한 어설픈 향수로 2002년 퇴임기념 고별 강연에도 참석했었는데, 그 때 마무리에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하셨던 대목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지라도/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때를/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 해도/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윌리엄 워즈워스,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

아버지의 존재와 무게는 과거 저에게 힘겨운 부담이기도 했지만, 이제 그것은 저의 자산이며,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이 되어줄 것으로 믿습니다. 제가 부족하나마 실정법 너머의 헌법적 정당성을 고민하는 학인(學人)으로 살아가게 된 힘의 저변에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가 물려주신 정신과 사유의 유산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제 딸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써서 왔습니다(5살 아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 동물들을 그려왔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의 편지와 그림이 영랑이 읊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워즈워스가 노래한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이 될 것으로 저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었고, 아버지가 가시는 길 적적하지 않도록 입관시 당신의 품 속에 고이 넣어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혜연이에요.

이제 우리 두 번 다시 못 보죠? 하지만 제가 꼭 마음 속에 할아버지를 새겨놓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윤재식이 되어주어 감사했습니다. 7년 동안이라도요. 이제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나의 윤재식 할아버지 천당으로 가십시오.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강진에서 발원한 지상으로 힘껏 뻗는 뿌리의 길은, 저라는 줄기를 거쳐, 사랑스런 손주들(혜연, 혜준)이 장차 찬란한 모란으로 피워낼 것입니다. 이제는 남은 과업과 시름은 지상의 저희들에게 모두 맡기시고, 아픔 없는 하늘에서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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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윤성현 삼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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