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란 무엇일까?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했다. 고대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전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개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건설한 도로의 규모가 장장 15만 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길이라는 말이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의 향가에서였다.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와 효소왕 때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에 도道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향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길이라고 풀이한다. 향가에는 길을 뜻하는 말로 로路또는 도道가 나오는데, 그것들을 길 또는 한자음 그대로 해독할 수도 있으나 도道와 시(尸)를 첨가하며 도라고 읽지 않고 길이라고 읽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길이라는 말은 한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순수한 우리말로 써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1100년 무렵 북송 때의 사람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와서 고려어를 한자로 적어서 전한 ‘손목’이 편찬한 일종의 견문록인 『계림유사』의 「고려 방언」조의 ‘행왈기림(行曰欺臨)’에는 간다는 말을 고려사람들은 ‘기림’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림이 길이 된 것을 보면 신라 때부터 사용해온 길이 고려로 이어져 조선 초기 훈민정음 창제 때는 ‘길’이라고 명백하게 표기됨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우리나라의 길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의주로 외엔 내놓을 만한 길이 없었다. 그 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사통팔달의 길이 뚫리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9세기 후반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이 개설되었다. 산예도, 금교도, 절령도를 비롯한 22개의 도로가 역로로서 개설되었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경 중심에서 한양 중심으로 도로망 구성을 재편하게 되었다. 그때 전국 도로망의 기점은 창덕궁의 돈화궁이었다. 제1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연행로 또는 사행로라고 하였다. 전국의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컸던 이 도로는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들의 내왕로였기 때문에 정비가 가장 잘된 도로였다. 주요 노정은 서울-고양-파주-장단-개성-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을 거쳐 대형 폭발 사고가 난 용천을 지나 의주에 이르는 길이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다길에 나아갑니다.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길은 돌담을 끼고 돌아갑니다.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있는 까닭이고내가 사는 것은 다만잃은 길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길」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내가 걸어온 길이 안개 속처럼 아스라하기만 하고 걸어가야 할 길은 칠흑처럼 어둡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조차 아련하고 언제 종점에 다다를지 알 수도 없다.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할 길, 그 길이 아직 내게 남아 있으리라는 것만이 확실하다. 그러기에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모든 인간의 일생은 자기에게 도달하는 길, 자기실현의 길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다니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자신을 잃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기도 한다.” 앙리 미쇼가 말한 것처럼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자신의 마음속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바로 걷기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그래서 평생을 떠돌며 길에서 생을 마감했던 사람들이 역사 속에 더러 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과 김삿갓이라고 불린 김병연 그리고 조선 시대의 아웃사이더 였던 매월당 김시습 등이었다. 김시습이 말년에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병들어 누워 있자 승려들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떤 병으로 누워 계십니까?” 그 말을 들은 매월당은 “나는 행락병(行樂病)에 걸렸네.” 평생을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면서 보낸 매월당다운 말이다.
길과 사람‘행락(行樂)’은 ‘즐기기 위해 돌아다니는 일’이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며 ‘자연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기도 하다.
‘행락(行樂)’은 돌아다니는 일(행(行))과 즐기는 일(락(樂))이 합해진 말로 ‘즐기기 위해 돌아다니는 일’이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며, ‘자연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루소였다. 그는 스스로를 길 가는 사람[행인(行人)]이라고 했고, 자기가 선사시대의 이상적인 산책자의 후예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여자로서 이 나라 산천을 가장 많이 떠돈 사람은 누구일까? 황진이다. 제주 출신 여성인 큰 상인 김만덕도 금강산을 유람했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여자들이 이 나라를 떠돌았지만 황진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진랑(眞娘)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하였다.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면서 풍악(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금성(나주)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와 함께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황진이는 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여 앉아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 황진이는 평생 화담의 사람 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가 30년을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죽을 무렵에 말하기를 “출상할 때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라고 하였다. 지금 노래하는 자도 그가 지은 노래를 능히 부르니 또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性翁識小錄)』 하권에 실린 글이다.세상에는 이런저런 길이 있다. 그렇다면 세상의 여러 길 중에 가장 도달하기 힘든 길은 어떤 길일까?
난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요그대 마음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어아직도 찾을 수 있을까그대 마음에 다가가는 길, 찾을 수 있을까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기다려줘, 기다려줘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대중가요 가수인 김광석의 「기다려줘」라는 노래의 가사 몇 구절이다.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찾다 보면 종착점에 다다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속으로 가는 길은 그처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 길을 사람들은 화엄의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고 있다. 하루나 이틀 하는 도보답사와 달리 열흘에서 보름까지 계속 걷는 장거리 도보답사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재미난 현상을 겪게 된다. 대개 엿새를 지나면서부터 꿈을 꾸면 길을 걷고 길을 묻는 꿈만 꾼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전에는 도란도란 대화라도 나누며 걷지만 오후에는 서로 싸운 사람처럼 혼자서 가고, 쉴 때도 혼자서 먼 산을 보며 쉬게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 실감 나는 것이 바로 장거리 도보답사를 할 때다. 장거리 도보답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길 위에서 나그네는 큰 것보다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 수안보 근처 삼거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정차해 있던 트럭 운전사가 우리를 한참 눈여겨보더니 차에서 내려와 “혹시 바나나 먹을 겁니까?” 하며 바나나 두 개를 건네주었다. “어디에나 조선의 인심은 남아 있구나!” 하다가 달리 생각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하게 보였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먹을 것을 건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쉴 때 가장 처량한 자세로 쉬어야 뭐든 얻어먹을 수 있다는 값진 진리(?)를 다시 한번 터득한 순간이었다. “여행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야 한다.” 이백의 글이다. “나그네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나니 그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헤세였으며, “나는 내게 길을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사람은 니체였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인생길 자체가 말 그대로 고행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길을 나서는 것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이다. 무엇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걷기를 시작할 것인가?
상상의 지도를 그려요. 가고 싶은 곳에 표시를 해요. 지도에 있는 대로 진짜 거리를 걸어가요. 지도엔 길이 있는데 진짜 땅엔 길이 없으면 장애물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서라도. 목적지에 닿으면 도시의 이름을 물어보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꽃다발을 건네줘요.
요코 오노의 글이다. 중국의 시인 이백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과객이라”라면서 인생이 세월 속의 나그네임을 토로했고 ‘길 떠날 때에는 눈썹도 빼놓고 가라’는 말은 여행길에는 힘이 드니 되도록 짐을 덜고 가라는 말이다. 그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길 떠난 나그네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작은 일로도 보람을 얻으니 나그네에겐 참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약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은 사전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로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가 지나는 공간을 뜻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는 노정, 삶이나 역사의 발전이 전개되는 과정 등 시간을 품은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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