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록⌟은 옛날 선비들이 공부하다 지칠 때나 심심풀이로 읽던 야담집野談集이다. 야담은 조선 중기부터 크게 유행하였고, 그 인기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에 현재까지 다양한 본本의 야담집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적 해학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는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보며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기발한 착상과 여유 있는 풍자에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가아총첩家兒寵妾
어떤 재상이 항상 말하였다.
“내가 영남 도백으로 있을 때에 집 아이가 한 기생첩을 사랑하였는데 내가 체차되어 돌아오며 함께 데리고 왔다. 수년이 지난 뒤에 스스로 꾸짖음을 얻은 줄 알고 창기를 두는 자는 이 어찌 사부(士夫)의 행실일가 싶어서 쫓아 보내었다. 이미 쫓아낸 후에 물었다.
‘그 여인이 떠날 때에 무어라 말하더냐?’ 물으니 ‘별로 다른 말이 없었고 다 못한 말을 하되이렇듯 수년 동안 건즐巾櫛을 받들어 오다가 문득 이러한 이별이 있으니, 유유한 나의 회포를 무엇으로써 형언하리오.’ 하며, 운자를 불러 별장(別章)을 짓겠다기에 곧 군君자를 부른즉 여인이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군자君字만 부르는고 하고 이에 읊어 갔습니다.
낙동강상초봉군(洙東江上初逢君)터니
보제원두우별군(普濟院頭又別君)이라
도화낙지홍무적(桃花落地紅無跡)하니
연월하시불억군(烟月何時不憶君)가
낙동강 위에서 님을 만나고
보제 원두에서 님과 여위니
복사꽃도 지며는 자취 감춘데
어느 세월 어느 땐들 내님 잊으랴
이렇게 읊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습니다. 그 말과 그 시를 듣고 주인은 그가 결연히 죽을 것을 알았다. 사람을 보내어 다시 불러오게 하였다. 이미 누암강樓岩江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내 아들이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두어 달 만에 죽었다. 내 또한 이 일이 있은 후로 때를 만나지 못하고 장차 늙어가니, 부자의 사이에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다른 이에게 가히 적원積怨할 수 있으랴 하고 그는 말하였다.
노견영문老犬靈聞
어떤 나그네가 산협 속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촌가에 투숙하였다. 다 못 한 늙은 여편네가 그의 투숙을 허락하면서
“이웃마을에 푸닥거리가 있어 나를 청하여 와서 보라 하나 집안에 남정이 없는 고로 갈 생각이 있어도 가지 못했더니, 손님이 오셨으니 잠간 저의 집을 보살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객은 이를 허락했다. 늙은 할미가 갔는데 그 집의 늙은 개가 곧 웃방에 들어와서 빈 그릇을 이끌어다 놓고 겹쳐 디디기 좋도록 한 다음 그 위에 뛰어올라 실겅 위의 떡을 핥아먹었다. 밤이 깊은 뒤에 할미가 돌아와 손으로 실겅위를 만지며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객이 그 연고를 물었더니 할미가 말하며
“어제 내가 시루떡을 쪄서 이 실겅 위에다 얹어 두었소. 결단코 손님이 잡수실 리가 없고 찾아보아도 없으니 어찌 괴이치 않으리오.”
하니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 일을 밝혀 말하기 거북하나 자기가 훔쳐 먹지 않았나 하는 허물을 면키 위하여 이에 그 자초지종의 본 바를 말하였다. 할미가 말하되
“물건이 오래되면 반드시 신神이 붙는다더니, 이 개가 이미 수십 년을 지낸 연고로 이렇게 흉측한 일을 하니 내일 마땅히 개백정을 불러다가 처치해야겠소” 한즉 개가 이 말을 듣고 나그네를 흘겨보며 독을 품는 눈치였다.
객이 마음에 몹시 두려워 다른 곳에 은신하여 옷과 이불을 그대로 깔아놓고 동정을 살피었다. 얼마 후에 개가 방 가운데 들어와 사납게 옷을 깨물며 몸을 흔들어 독을 풍기며 오래 있다가 나갔다. 객이 모골이 송연하여 주인 할미를 깨워 일으킨 후에 개를 찾게 하였다. 개는 이미 기진하여 죽어 넘어가고 있었다.
그 객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르되 짐승도 오히려 그 허물을 듣기 싫어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남이 모자라는 것을 털어 얘기할 수 있을까 보냐 하였다.
산망석山忘釋
윤생尹生이란 자가 관서에 객유客遊하였다. 한 촌집에서 묵었는데 비에 막혀 돌아오지 못하였다 안주인이 비록 늙었으나 말씨와 모양과 행동거지가 촌노파같지 않았다. 하루는 안주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행차가 반드시 심심하실 터인데 내가 옛날 얘기나 해드려서 한번 웃으시는 게 어떠하오십니까?”
그것 참 좋습니다. 하고 윤생이 답하였다. 이때 주인 늙은이(남편)가 즐기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
“불길한 말을 이제 또 말하려고 하느뇨?”
“당신과 내가 함께 늙은지라 그 말을 해서 무엇이 해로 우리오?”
하며 노파가 이어서
“내가 본시 초산기생楚山妓生으로 나이 열여섯에 초산 사또에게 홀리어 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그의 방에서만 함께 지냈습니다. 사또가 갈려 가게 되어 이별해 가면서 소용의 가장집물을 전부 나에게 주었지요. 또한 후하게 먹을 것까지 준 후에 나에게 말하며 ‘내가 돌아간 후에 너도 곧 뒤따라 올라와서 함께 백 년을 지내는 것이 옳으리라’ 해서 내가 울면서 허락 했지요. 사또가 간 후에 정분을 억제치 못하여 그가 준 것으로 패물로 바꾸어 가지고 동자 한 놈만 데리고 홀홀히 떠나갔습니다. 겨우 수일간의 길을 가다가 때마침 추운 겨울이라 대설大雪이 나부끼며 가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동자로 하여금 말을 버리고 길을 찾게 하였더니, 깊은 눈구덩이에 빠져 그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중도에 머뭇거리게 되고 추위는 심하고 다리는 아픈 위에 날 또한 어두워지던 터에 멀리 깜빡거리는 등불이 숲 사이에 밝게 비추는 것을 보고 사람의 집이 있음을 알고 간신히 찾아가 문을 두드리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처님 암자인데 고요하여 사람 하나 없고 탁자 위에 다만 흰 부처님 한 분이 계실 뿐이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방 아랫목이 이미 따뜻하고 등불이 또한 밝은데, 중도 없으니 괴상하고도 괴상하도다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으로 궁한 처지에 어디 달리 갈 데가 없고 해서 몸소 말안장을 풀어 죽을 쑤어 말에게 먹이고 홀로 방 가운데 누웠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몸이 녹으면서 번열증이 심한지라 사람은 없고 해서 치마저고리를 다 벗고 속옷만 입고 몸둥아리를 드러내 놓고 누어있었습니다. 뜻 아니한 중에 스님 한 분이 달려들어 강간하니 비록 항거하려고 하였으나 밤중 깊은 산에 그 누가 와서 구해 주겠습니까. 원래 이 스님은 이미 십여 세 때부터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벽곡(辟穀 : 생식)하고 홀로 암자 가운데 살았던 스님이었습니다. 나이가 이십 팔 세라 위에 이른 바 탁자 위의 백의 부처님이 곧 그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었지요, 계행이 비록 높으나 정욕이 움직이니 어찌 가히 억제하겠습니까?
이튿날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적설이 처마에 쌓여 돌아가고자 하나 어찌 할 수가 없어 그럭저럭 겨울을 나니 두 사람의 정분이 함께 흡족하게 두터워 졌지요. 스님이 말하며 ‘나도 그대를 구하지 않았고 그대도 나를 찾지 않았건만 어찌 길로 쌓인 눈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만나게 하여 줄줄 알았으랴. 나의 계획은 그대로 인하여 훼손되고 그대의 절개는 나로 인연하여 이지러졌으니, 일이 이에 이르러 묘하게 합치게 되었지요. 이는 하늘이 그대와 나의 좋은 인연을 만들어 준 바이라 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옛 낭군을 찾아가서 첩이 될 것인가 나와 더불어 해로하여 함께 안락함을 누리는 것이 어떠하겠소?’ 하거늘 내 또한 생각해 보매 말과 실지가 이치 있는 듯하여 그 스님을 따라 여기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딸을 낳아 집안이 또한 넉넉하니 이 어찌 하늘의 이치가 아니리오. 저 늙은이가 바로 당일의 산승입니다. 하니 늙은이 또한 웃으면서 말이 없었다.
량처무신良妻無信
옛날에 봄놀이 하던 여러 선비가 산사山寺에 모여 우연히 여편네 자랑으로 갑과 을을 정하지 못하더니, 곁에 한 늙은 스님이 고요히 듣고 있다가 한참 만에 길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여러분 높으신 선비들은 쓸데없는 우스갯소리를 거두시고 모름지기 내 말씀을 들어 보시오. 소승은 곧 옛날의 한다 는 한량이었지요.
처가 죽은 후 재취하였더니 재취가 어찌 고운지 참아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다정히 지내다가 마침 되놈들이 쳐들어와 크게 분탕질이라, 사랑하는 아내한테 빠져 능히 창을 잡아 앞으로 달리지 못하고 처를 이끌고 도망치다가 말탄 되놈들에게 붙잡힌 바 되었지요.
되놈이 처의 아름다움을 보고 소승을 장막 아래에 붙잡아 매고 처를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자거늘 깃대와 북이 자주 접하매 운우雲雨가 여러 번 무르익어 남자도 좋아하고 계집은 기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어 더럽더니, 밤중에 계집이 되놈장수에게 본부가 곁에 있어서 마침내 편안한 마음으로 하기 곤란하니, 죽여 없애는 것이 어떠하오?
’하매, 그 두목이 ‘네 말이 옳도다. 좋아! 좋아!’했다. 소승이 이에 그 음란한데 분통이 터진 데다가 또한 이 말에 놀래었지요.
있는 기운을 힘껏 써서 팔을 펴 매어 묶은 끈이 다행이 끊어지는지라 청룡도靑龍刀를 훔쳐 바로 장막 안에 뛰어 들어 남녀를 함께 벤 후에 몸을 빼쳐 도망해 돌아갔지요. 머리를 깎고 치의緇衣를 입어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였지요.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여러분 높으신 선비들의 여편네 자랑을 어찌 가히 다 믿을 수가 있으리오. 하니 여러 선비들이 무연히 말이 없었다.
세상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이 덕을 베풀고 살면 그 베푸는 만큼의 복 이 되돌아 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가 행한 업겁을 어찌 벗어나겠는가 싶은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키가 커도 하찮은 나무보다 크지 않으며 아무리 달리기를 잘 해도 하찮은 동물보다 느리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비열한 짓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짓밟은 짓이다. 힘 있는 자에게 애교愛嬌와 교태嬌態를 부리지 말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가
난 한자를 돌보며 자신을 쉼 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 것이라고 본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