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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익어가는 벼들의 속삭임이 행복하게 들린다. 그들의 익어가는 소리다. 경운기 한 대가 농로를 지나간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벼들이 익어가고 탈곡기가 지나가면 다시 논바닥이 들어날 것이다. 10분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익어간다’는 글이 어디선가 읽었던 낯설지 않은 글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수 노사연 씨의 ‘바램’ 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라는 끝부분의 가사다. 벼들이 익어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수확의 계절 가을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편안함일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을 읽지 않고는 못 넘어가는 계절, 가을인 것이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나의 하루를 편안하게 마감해주는 프로가 2개 있다. 밤 12시 20분에 하는 EBS의 지식채널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여 보여주면서 생각의 폭과 지식을 넓혀주고 삶의 지혜를 얻게 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후에 하는 프로가 더 재밌다. 8월 어느 날 지식채널을 본 후였다. 다른 일을 하다가 텔레비전을 다시 봤을 때 계속 한 장면이 멈추어 있었다. 나레이션도 없다. 그냥 멈추어진 화면이어서 텔레비전이 잘못됐나 했다. 그 제목이 EBS 가만히 10분 멍TV 프로다. 비오면 비 소리만, 바람 불면 바람소리, 한옥거리만 10분, 가을의 들녘 10분, 정원만 10분, 이 프로는 집중할 필요도 없이 그저 멍하니 화면을 보면 된다. 그런데 10분이라는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게 10분 멍의 매력이다. 며칠 전에 사업일로 서울에서 온 40대 젊은 아빠 두 분과 저녁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 두 아빠가 번갈아 차례로 밖으로 나가더니 한 30분씩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이 나가고 나면 이야기가 끊기고 또 한 사람이 나가고 나면 또 그렇게 반복되었다. 그리고 나간 두 사람은 나갔다 하면 내내 통화중이었다.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가족이야기가 나오고 두 아빠는 딸 셋, 딸 둘의 아빠였다. 알고 보니 밖으로 나가서 30분 이상씩 집에다 전화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들과의 전화통화였다는 것 아닌가. 새삼 요즘 젊은 아빠들의 애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횟수가 적어지니 엄마들의 집안일이 늘어났는데 그 이유가 자녀들의 돌봄인 것이었다. 마침 두 아빠의 아내들은 둘 다 전업주부여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시간들이 있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계속 집에 많이 있다 보니 아내들도 짜증이 늘어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을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도 못하니 어차피 집으로 빨리빨리 들어가는 집콕 아빠들의 말은 집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줘야 집안이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출장 와서 30분 이상씩 딸들과 전화를 하며 놀아줘야 한다는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코로나가 오기 전에 아들 셋이 모두 20대가 넘어서 다행이고, 오히려 우리하고 놀지도 않는다는 농담을 했지만, 딸 셋, 딸 둘의 두 아빠의 모습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아이들의 학업이 어떻게 될지 미래는 불투명하고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여건도 어지러운 사회, 총칼을 쓰지 않고도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최근 세계적 통계에서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숫자보다도 코로나19로 인해 희생된 숫자가 더 많다는 보도가 그렇다. 그런데 젊은 아빠들은 요즘 코로나19 보다도 더 무서운 한 사람 때문에 더 멍 때린다고 했다. 조두순이라는 사람이다. 2008년 12월 경기도 안산시에서 8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상해를 입힌 사건이다. 이 사람은 재판에서 음주상태와 심신미약이 참작돼 12년형을 살았는데 올해 12월 13일 출소를 앞두고 있고 안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안산시가 무도 3단 이상 실력의 경호 전문가를 6명 채용하고 2개 순찰팀을 꾸리고 지역별 자율방범대 로보캅 순찰대 등으로 24시간 순찰할 예정이라는데 그 방지책이 멍 때리지 않을 수 없다. 인권, 법 이런 것들도 인간이 만들었다면 왜 그 푸는 열쇠는 솔로몬 같은 지혜로 닦지 못했을까. 어린 피해자와 가족들은 다시 벌벌 떨고 범죄자는 형기를 마치 것이 죄를 용서 받은 듯 다시 도시를 돌아다니게 된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한 사람 때문에 전 국민이 벌벌 떠는 보도를 내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현 우리의 시대다. 그 날 70대 중반 해방둥이로 태어나신 어르신은 그 험난한 시대에 많은 가족과 많은 동생들을 돌보며 장남의 역할을 다하며 고생했어도, 우리가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고 말씀 하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명절이면 가족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조상의 묘도 돌보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을 살았음에 감사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작은 바람마저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된 아픔이 섞인 말씀이기도 하다. “며느라 코로나 없는 추석이 효도다. 느그들끼리 집콕 함시롱 즐겁게 지내라”. “아범아 추석에 코로나 몰고 오지말고 용돈만 보내라”, “불효자는 옵니다” 이런 현수막을 걸고 즐거워라 해야 하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가을날이다. 비바람과 태풍을 견디고 노랗게 벼가 익어간다. 늙어 가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익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가을 들녘, 가만히 10분 멍하니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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