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엿뉘엿 태양은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시나브로 갈대는 호젓함의 큰 숲을 이룬다. 사이사이로 새들의 재잘거림이 저녁을 맞이하려는 듯 인간적이다. 밤새 그들은 무엇을 말하며 꿈꿀까? 다만 고단했던 하루의 삶을 회복하는 정도일까? 감성적 이 실존의 물음은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낸다. 갈대숲 너머 남포 마을 위로 지역사회적 상상력을 쏘아 놓는다.
갈대는 ‘윤수일’이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함성들 사이로 들려온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 으쌰라 으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한 목소리로 만들어내는 풍경은 촌놈에게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후로도 그것은 어렵지 않게 보곤 하였는데, 문득문득 물음이 일곤 하였다. 윤수일이 노래하는 그 동네는 어디일까. 실존할까? 하늘의 별들이 소곤소곤 속삭이고, 땅위의 갈대가 서걱서걱 하모니를 연주하는 그곳은 무릉일까? 누구인들 한번은 가보고 싶지 않을까? 인간적인 이 바람은 기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일까? 천상의 별과 지상의 갈대가 화음을 만드는 거기. 우리 사는 이곳 강진이면 좋겠다.
갈대는 ‘신경림’이다. 세상살이 초입에서 그를 만났다. 어른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때 나직이 들려주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삶과 울음을 등치시키는 것은 그 시절의 슬픈 특권이었으리라. 화약고를 안은 온몸은 그렇게 실존적 물음과 해답을 찾아갔다.
어느덧 사람살이가 중천에 이르면서, 그는 다시 메시지를 건네었다. 삶의 근원적인 성찰을 안내하였다. 산다는 것은,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바로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이라고 다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을 달리하며 더하여 말하였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갈대도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너도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라고 하는 이른바 “슬픔의 연대”를 눈뜨게 하였다. “약한 것들이 함께 모여 서걱거릴 때, 슬픔은 사랑으로 진화 한다”는 것을 역설하엿다. 슬픔이 말을 걸면 기쁨이 어깨동무하는 사람살이, 우리 사는 이곳 강진이면 좋겠다.
갈대는 ‘다산’이다. 그 시절 다산초당을 오르던 길에는 길손을 압도하는 풍경이 있었다. 갈대의 군무가 그것이다. 비록 길가의 존재이었지만, 그것은 시대의 질곡을 적나라하게 오버랩하였다. 통곡하는 이 세상 앞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마주하는 다산의 지성을 클로즈업 하였다.
“갈대밭의 젊은 아낙 울음소리 처량도 해 / 관문 향해 울부짖고 하늘 향해 통곡 하네.” 세상살이는 기막힌 현실이었다. 죽은 시아버지와 갓 낳은 자식이 군적에 올라가 있고, 이것에 격분하여 젊은 아내의 남편은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잘라버린다. 그런데 핍진한 이 세월의 한편에는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한 톨의 세금도 내지 않는 양반 부호들이 있었다. “말이나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고 말하거늘 / 하물며 우리 백성 자손 잇는 길임에야 / 부잣집엔 일 년 내낸 풍악소리 울리지만 /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구나.”
정치공동체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권력적 기초가 무너진 마당에서 다산은 무엇을 보았을까? 목민의 질서 회복은 곧 정치질서의 개조라 할 수 있을 터이니, 저 바다건너 파리코뮌의 세계를 꿈꾸고 있지는 않았을까? 지배계층의 도덕적 기초가 붕괴되어진 현장을 목도한 그 지성은 기실 체제변혁을 모색하려 하지 않았을까? 궁핍한 시대의 지성은 정말 유지의 보수적인 실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까? 그럼에도 다산의 역사적 성취는 오늘날 여전한 울림을 준다. 그의 목민의 리더십이 활착하여 꽃피는 곳, 우리 사는 이곳 강진이면 좋겠다.
바람이 분다. 갈대가 호명하는 사회적 상상력이 지역사회의 곳곳에 입김으로 스미면 좋겠다. 사람살이의 은총으로 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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