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겨울
이 윤:광주경찰청 경무과장(전 강진경찰서장)
2008년 12월 24일 그 남자의 겨울은 따뜻했다. 아름답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의 야경이 차가운 겨울날씨를 따스하게 녹여주는 날이기도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그 못지않은 선물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강진다솜회에서 보내준 사랑의 김장김치가 바로 그 선물이다. 강진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봉사단체인 강진다솜회에 명예회원으로 가입한 후 한 일도 없이 김장김치를 받고 있다. 연말에 독거노인 돕기 일환으로 하고 있다는 사랑의 김장을 광주로 떠난 독거노인에게까지 잊지 않고 보내주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 전 우리 광주경찰청에서도 350포기의 김장김치를 담아 독거노인들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그날 저녁 충주에 있는 아내에게서 전화가 와 자랑삼아 독거노인들에게 김장김치를 전달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대번에 “당신이 독거노인이잖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무리 그래도 독거노인은 너무하다.”라고 말했지만 '독거노인‘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독거노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독거노인 소리를 들으니 나이 먹는 게 더 두렵게 느껴지고 있다. 오십이 넘으면서부터는 연말이 되면 새해를 맞는 기쁨보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커지곤 하는데 그 이유 중 첫째가 나이 먹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된장국이 그리워지는 겨울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독거노인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야 할지······. 이런 말 하면 멀리 있는 아내가 자신을 죄인 만든다고 바가지를 긁어댈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독거노인이면 나는 독거할머니가 되는 거네.”라고 말하며 웃던 아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하지만 관사로 돌아가는 저녁시간이면 엘리베이터 작은 공간에서 독거노인의 쓸쓸함이 밀려온다. 사방으로 붙박이 된 거울에 그 남자의 얼굴이 비칠 때이다. 이 거울 저 거울 한 바퀴 돌며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사방으로 보이는 그 남자의 얼굴이 독거노인과 다를 것도 없다.
연말연시 여기저기에서 이웃돕기의 아름다운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중에 하나 매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전후에서 주민센터(옛 동사무소) 화단에 돈 박스를 놓고 간다는 ‘얼굴 없는 천사’의 기사가 떠오른다. “동사무소 지하주차장 입구 화단에 박스가 있으니 가보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는데, 올해도 현금 2,000만원과 돼지저금통 38만1000원이었다고 한다. 그 기사에서 보면 9년째 8109만원을 놓고 갔다고 하는데 경찰의 눈으로는 그 미스테리의 사나이를 수사하고도 싶어진다. 한번도 하기 어려운 선행을 9년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그 사람이 무척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천사’의 아름다운 선행을 접하면서 얼굴을 내밀며 김장김치를 전해주었던 그 남자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지난번 청에서 이웃돕기로 담근 김장김치를 독거노인을 찾아가 직접 전해주던 때 얼마나 가슴 뭉클했는지 모른다. 이처럼 어떠한 방법이든 선행은 곧 나의 행복임을 여러 번 느껴왔다. 그래서 결국 남을 돕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이웃을 돕는 일조차 줄어들고 있다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이런 때 일수록 오히려 나눔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나누면 나눌수록 채워지는 것은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사회가 좀 더 행복해지고 밝은 사회가 되는 데는 서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이다. ‘얼굴 없는 천사’들이 많으면 좋겠지만 ‘얼굴 있는 천사’들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그래서 많은 천사들이 구석구석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혀준다면 사회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며 범죄는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생계형 범죄는 대부분 생활형편이 어려워 빚어지는 안타까운 우발적 범행인 것이다. 어려울수록 주변을 조금만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의 마지막 날엔 그 남자도 독거할머니와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겠다. 김장김치가 한통 있으니 넉넉한 겨울이 준비돼 있다. 예부터 겨울준비의 첫 번째가 김장 아니던가. 독거할머니에게 겨울준비 다 해놨다고 큰소리 뻥뻥 칠 수 있게 해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김장김치 쫙쫙 길게 찢어서 뜨끈뜨끈한 밥숟갈 위에 올려주며 한해를 행복하게 마무리 해야겠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