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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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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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1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一箭解圍 일전해위 : 화살 하나로 포위를 풀다.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는 조선 중기 무신, 신립 장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계미년 봄이 되자 여진족 1만여 철기대가 쳐들어와 경원도호부의 훈융진을 포위한 뒤 장성문을 철거하고 충교[衝橋-충차(衝車:성문 파쇄차)와 판교(板橋:널다리)를 만들어 성문을 공격하자 농성을 펼치던 조선군은 화살이 다하고 사기도 떨어져 함락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바로 이때 온성부사 신립이 훈융진이 위기에 처했다는 급보를 듣고 지름길로 내달려 포위하고 있던 여진족을 급습했다. 신립은 진중에서 눈에 띄는 적장을 노려 화살 한 대를 날렸다. 추장이 말에서 떨어지자 포위중이던 여진족은 혼란에 빠졌고 이 와중에 신립을 알아본 여진족 병사가 있어 “온성의 신립이 왔다”고 소리치자 나머지 여진족들이 활을 거두고 급하게 철수했다.

바깥 공기가 달라짐을 느낀 성안의 병사들은 남은 힘을 쥐어짜서 성문을 활짝 열고 구원군과 힘을 모아 여진족을 추격했다. 한번 승기를 잡자 신립과 훈융진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여진족의 거처를 휩쓸어버렸다.

 

그림을 보면 얼마 남지 않은 훈융진의 병사들이 혼신을 다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포위를 하고 있는 여진족의 기마궁병들이 즐비하다. 이때 우측에 6기의 기병이 등장한다. 모두들 포위중인 여진족을 들이치고 있는데 화살 한 대를 들고 있는 화려한 녹색 투구의 장군이 보인다. 그가 바로 신립 장군이다. 그리고 그 옆에 부장이 백마를 타고 대장기를 들고 있다. 신립 장군이 들고 있는 화살은 형태가 삼지창 형태의 촉을 하고 있는 특수형 화살이거나 공격 명령을 상징하는 효시(嚆矢:우는 살, 소리통이 있어 화살을 날리면 소리가 난다. 이 소리가 전 병력에게 공격개시 명령으로 통하는데 이 특징을 차용해 ‘어떤 일의 시작’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의 유래가 됐다)로 보인다.

 

 기마전의 달인 신립, 기마전에 발목 잡히다.

 

임진왜란중 탄금대 전투에서 허망하게 순절한 것으로만 알려졌지만 원래 신립은 조선시대 중기 빼어난 무장이었다. 신립(申砬, 1546~1592)은 명종 원년(1546년) 10월 23일 평산 신씨 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해공 신익희의 13대조이다.

 

명문가에 태어난 덕도 있지만 그의 무운은 일찍 트였다. 1567년(선조 1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한 것이다. 부임지를 두루 거치며 성장한 그는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에 임명된다. 이 무렵 여진족 추장 니탕개(尼湯介)가 세력을 키워 변방을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노략했으나 조선의 장수들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니탕개 입장에서 조선의 변방은 심심할 때 주머니에서 꺼내먹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손쉬운 상대였다. 추수철만 되면 쳐들어와서 쌀과 여자들을 가져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그 재미도 1568년 까지였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늘 오던 길로, 늘 하던 방식으로 조선의 변방에 니탕개(尼湯介)와 군사들이 쳐들어 왔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조선의 장수가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니탕개는 일단 후퇴를 한다. 그런데 조선의 장수가 수비만 한 것이 아니라 두만강을 건너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기어이 여진족 부하 50여 명의 목을 베어 개선해버렸다.

 

이후 분노한 니탕개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 훈융진(訓戎鎭)을 쳐들어왔다. 신립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병 500여기를 동원,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반격에 나선다. 니탕개 입장에서는 500기의 기병으로 20배가 넘는 1만 명의 부대에 도전을 하는 신립이 무모해 보여 헛웃음이 절로 났다.

그런데 웬걸, 그 500여기의 기병에 의해 1만 명이 한 순간에 사기를 잃고 전선이 붕괴됐다. 조선 기병의 무서운 기세에 진중이 크게 혼란해졌고 자중지란을 일으켜 같은 편에 밟혀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여진족이 생각지 못한 기병전술을 펼친 신립 장군은 여진족 1만 여명을 물리친데 이어 여진족이 평소 함경도를 침략할 때 경유하던 안두리 부락을 불태웠다. 신립은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1584년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한다.

이때 신립은 조선에서 가장 이름난 장수가 된다. 20배가 넘는 적을 물리친 그의 공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그가 출동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며 시쳇말로 ‘조선의 안심보험’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과(過)가 있었는데....

1587년 흥양(興陽:지금의 고흥)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로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가 철수했다. 그런데 그는 돌아오는 길에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고 이에 대해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얼마 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됐으나 병졸을 참살한 죄(조선 조정에서 병졸 한명의 가치에 대해서 상당히 높게 평가한 부분은 조금 놀랍기도 하다)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쫓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의 군공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를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하고 상방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했다.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병력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조령(鳥嶺)에 올라 왜군에 대비했다. 이날 작전회의에서 종사관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 북방에서 기병전술을 통해 대승을 거뒀던 경험을 믿고 일본군과 결전을 통해 임진왜란 전황에 대반전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한다. 탄금대 부근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배수의 진은 한 고조 유방 때 개국공신 회음후 한신이 성공한 이후 성공한 적이 없는 최후의 전술이었다. 심지어 군신(軍神)으로 불리는 관우도 배수의 진을 잘못 펼쳐 잡혀죽은 전술로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사실 신립이 왜 그걸 모르겠는가. 당시 조령수비군은 날이 갈수록 탈영병이 늘었고 어렵게 끌어 모은 말도 평소 훈련된 군마(軍馬)가 아니라 짐 끌던 노새와 나귀까지 탈 수 있는 네 발 달린 짐승은 억지로 끌어 모은 터라 제대로 된 기병은 아니었다. 하필 이날이 조선군 운명의 날로 정해졌는지 전투를 앞두고 큰 비가 내려 탄금대 일대는 땅이 논처럼 변해 말이 달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만 비가 오면 조총은 쏠 수 없다는 점이 신립의 마지막 위안 거리였다. 그런데, 신은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4월 28일, 결전이 벌어진 이날 해가 뜨고 만 것이다. 말이 달리기에는 최악의 땅에 상대편이 총을 쏘기에 불편이 없는 날이 되면 대장으로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퇴하는 것이 나았을 터인데 신립은 굳이 강행돌파를 감행한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차분하게 대응하며 조선군을 압박했고 조총 앞에 조선군은 하나둘 스러져갔다.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신립은 김여물에게 선조 임금께 올리는 장계를 쓰게 하고 전령을 통해 조정에게 바치게 했다. 이후 김여물과 함께 적진을 향해 달렸으나 힘이 다했고 강가로 몰리자 패장으로서 항복하기 보다는 자결을 택한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문제는 신립의 전사로 끝난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조선의 안심보험 신립만 믿고 있던 충주의 백성들은 피난도 하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전세(戰勢)를 관망하다가 곧이어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거의 학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죽음은 장렬(壯烈)했기에 조선 조정은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공을 기려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한다.

다음호에 계속

 

 Tip 시호(諡號)

시호는 고려와 조선시대 왕족을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하는 데 중복되는 경우가 있다.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12명에 이르며 충장공도 이에 뒤지지 않은데 그 이름만 보면 다음과 같다.

충장공 정분(忠壯公 鄭苯) 조선시대 문신, 충장공 이보흠(忠壯公 李甫欽) 조선시대 문신,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이의배(忠壯公 李義培)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남이흥(忠壯公 南以興)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은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권율(忠莊公 權慄) 조선시대 무신, 충장공 천만리(忠莊公 千萬里) 조선시대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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