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탐진만 햇발(탐라와 탐진 벽랑국의 세 공주)
HOME 회사소개 이용약관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기자회원신청
로그인 회원가입
기본스킨 오렌지스킨 보라스킨 연두스킨 그레이스킨
2019년 4월 18일 목요일
뉴스홈 > 문화/예술
2008-10-15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탐진만 햇발(탐라와 탐진 벽랑국의 세 공주)

 

탐진만 햇발

탐라와 탐진 벽랑국의 세 공주


박주익


▲ 탐라고기(耽羅古記) 번역

태초엔 사람이나 생물이 없었다. 마침내 세 분의 신인이 나타나 한라산 북쪽 넓은 들이 있는 모흥혈 지대에 사셨다. 첫째 분은 양을나 이고 둘째 분은 고을나 이며 셋째 분은 부을나 였다(‘을나’는 왕을 지칭).

세분은 수렵활동과 사냥을 즐기어 여기서 얻은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육식을 하였다. 하루는 자주색 진흙으로 봉인된 목(나무)함이 떠 내려와 동쪽 해안에 닿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목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석(돌)함과 함께 자주색의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가 있어, 마침내 그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명의 처녀와 함께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오곡의 종자 등이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벽랑국(탐진현 벽랑도)의 사자인데, 저의 왕이 세 명의 공주를 낳아 기르시다 서쪽바다 가운데 산(한라산)에 신의 아들 세 명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려고 하나 배필이 없는지라, 사자인 나에게 명하여 ‘세 명의 공주를 데리고 가 배필을 정해 대업을 이루도록 하라’하여 왔습니다.”라고 하며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분이 차례대로 공주와 짝을 지어 물 좋고 기름진 땅을 찾아 활쏘기를 해서 살 땅을 정하니, 양을나께서 사신 땅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께서 사신 땅을 제이도라 하며, 부을나께서 사신 땅을 제삼도라 하여 오곡을 뿌리고 말과 소를 키워 날이 갈수록 자산이 늘어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 벽랑국의 세 공주는 누구였을까

탐라고기(耽羅古記)는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양 고 부’ 세 성씨 시조의 설화를 담은 모흥혈(毛興穴또는 三姓穴)에 대한 지신용출(地神湧出) 탐라개국 설화이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탐라현조, 동문선,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설명되고 있다. 제주(濟州)는 본래 탐라국(耽羅國)으로 삼국시대 백제에 복속되었다.

설화의 내용 중 ‘벽랑국에서 온 세 명의 공주가 제주에 도착해 제주의 세 왕자와 혼인하여 탐라국를 세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찍이 학자들은 설화에 등장하는 벽랑국(碧浪國)의 소재가 어디인가에 대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영토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신라후기 경덕왕 때 불려진 탐진현 남쪽 섬의 하나인 벽랑도(현 소랑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재 그 지명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대동여지도」가 그려진 얼마 후 한반도는 일본의 강점 하에 들어가면서 벽랑도는 지도상에서 사라지면서, 식민사관 견지에서 소랑도(小狼島)로 바뀐 것 같다.

제주도 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채바다)이 확인한 벽랑도에는 섬 꼭대기 산봉우리 양지바른 바위 곁에 설화에 나오는 자소각(紫宵閣)이 있다고 한다. 한라산이 보이는 지점으로 예부터 설날 등에 마을사람들의 풍년과 안녕을 축원하는 신당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탐진만과 탐라의 해로

완도군이 1896년 독립되기 까지 근대 이전에는 완도 지역의 섬 대부분이 탐진(강진)현에 속했다. 또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려사’ 지리지(1451년)와 ‘동국여지승람’(1486)의 기록에서 벽랑도가 탐진현에 속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탐라고기의 벽랑국은 탐진현 벽랑도 라는 것으로 과거 탐진현의 소국 벽랑도에서 세 명의 공주를 탐라에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이 같은 탐라고기의 설화는 탐라와 탐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탐라에서 육지를 오갈 때에 탐진만을 이용했던 해로의 역사와 밀접하다.

탐라의 해로와 탐진만의 관계는 또한 통일신라시대 탐라에서 탐진을 거쳐 신라에 올라가 벼슬을 한 고․양씨들의 유래에서도 벽랑국이 나온다. 양씨들의 ‘탐라→벽랑국(先外家)→탐진→양과리(良瓜里, 광주 광산)→신라진출’설은 분명히 벽랑국이 벽랑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양(良)씨는 신라시대에 양(梁)씨로 바뀐다. 지금도 양씨들의 선대묘가 칠량면 소재지 부근에 있으며, 강진지역에서 양씨와 고씨들의 흔적이 도처에 발견되고 있음은 탐라인들의 활발한 육지 진출과 관련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 박주익 : 시인, 향토사조사위원, 전남대법대 졸업(법학석사)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뉴스스크랩하기
기자이름없음 
문화/예술섹션 목록으로
제8회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와보랑께 박물관"으로 더...
강진 오감통 음악창작 “生...
탐진만 햇발정월대보름" 김...
“정약용이 근대적? ‘보수...
다음기사 : 시조한편(복원 백련사) (2008-10-15)
이전기사 : 삶의 길목에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2008-10-08)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동백꽃 여인
조직폭력배 이제 ...
선거와 프로야구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게시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사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알립니다 독자투고 기사제보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