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52
일명경인(一鳴驚人)
김현임(수필가)
“띵똥!”
하필 무언가로 한창 바쁜 시간이면 울리는 문자메시지 알람이다. 누군가로부터 보내지는 긴급한 연락이 아닐까? 하지만 열자마자 노란 화면 속 반갑잖은 글귀와 마주친다,
‘안녕하십니까? 기호 몇 번....’
기다린 적 없는 이런 장문의 편지에 매번 속으면서도 손에 묻은 비눗기나 고춧가루 등속들도 못 닦은 채 확인을 하곤 한다.
받아두고 벼르고만 있던 문학동인지를 펼쳤다. 수업 시간 창 너머로 보이던 교정의 정원수를 모임 명(名)으로 빌려 책의 표제가 된 히말라야 시더의 학명(學名), 속명(俗名)까지 정성스레 밝혀놓았다. 이 책을 출발로 동문들의 문학의 숲이 울창해지기를 바란다는 화합 취지에 걸맞게 운송(雲松), 향백(香柏)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소나무 과(科)의 수종. 덧붙인 ‘희조랍아삼(喜鳥拉雅杉)’을 나무의 고운 향기에 새가 즐거이 머물러있다는 뜻이려니 짐작하며 나 또한 본격적으로 책의 아름다운 그늘로 숨어들어 볼까하던 순간, 또 다시 울리는 띵똥! 하여 책의 첫 페이지도 펼치기도 전 독서의 흥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바깥이 왁자하다. 선거꾼들의 공세가 날이 갈수록 요란하다. 며칠 전부터는 확성기까지 동원해 지지하는 후보의 홍보에 열을 올린다. 너나없이 굽신, 굽신이다. 뽑아주고 나면 저 허리가 언제 그랬었나, 대다수 뒤로 발딱 잦혀지겠지. 지극히 겸손한 후보들의 얼굴도 위상격상(位相格上)을 위한 선거치레용 가장(假裝)이다. 진정한 목민(牧民)이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돌보는데 힘쓰는 일이라는 다산 선생의 충고, 그것만 잘 실천하는 후보라면 한 치 망설임 없이 붉은 도장을 딱 찍어 줄 텐데. 옛 벼슬아치들은 사람을 길렀는데 오늘날 벼슬에 종사하는 자들은 제 몸뚱이만 기른다던가. 흡사 떠들썩한 고물장수 확성기 소리에 진배없다. 지저분한 묵은 살림을 치워주는 것도 고마운데 덤으로 몇 장 비누까지 안겨 주던 장사치의 보답은커녕, 임기동안 허겁지겁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정치꾼들도 적지 않았다.
출사표를 던진 자들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다. 50년 지기(知己)의 고교동문들이 도지사 후보 과열경쟁으로 검찰 고발까지 번졌다. 제각각 상대를 향해 허위사실 유포다, 상대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사실 무근한 말들을 퍼트리고 있다며 최악의 비수(匕首)인 법정 다툼까지 불사한 것이다. 동창생들만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 두 번째 도시를 쥐락펴락할 시장선거에 나선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네거티브 폭로전이 뜨겁다 못해 폭발 수위에 다다랐다. 박사논문이 표절이니 당장 후보직을 사퇴하라는 경쟁 후보의 압력에 대꾸할 가치도 없는 흑색선전이라고 맞받아치며 그 쪽이야말로 원전비리 사건의 장본인이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일명경인(一鳴驚人), 단 한 번의 목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춘추전국 시대,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난 세객(說客)이었다. 당시 제나라 위왕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나 즉위 후 국가의 큰일을 고관대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밤낮없이 주색에 빠져 지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관리들의 부패와 탐욕에 나라는 곧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구도 국왕의 권위에 눌려 직언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총명함을 내세우기 위해 희학(戱謔)적인 변말을 즐기던 위왕, 그런 왕의 특성을 알기에 순우곤은 직언을 피해 은근한 설득에 나섰다. 바로 수수께끼놀이였다.
“마마, 우리나라에 아주 아름답고 큰새가 한 마리 있는데 지금 성상께서 거하시는 궁궐 나무에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새는 단 한 번도 울거나 날아가지 않고 잔뜩 움츠리고만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위왕은 본디 총명한 사람이라 그 숨은 뜻을 곧 알아 차렸다. 우아한 털빛의 몸피 우람한 새는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뜻 아닌가. 궁정에서 날이면 날마다 즐거움만 추구할 뿐 국왕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질책이었다.
“오호라! 그 새 말인가. 그대가 몰라서 그렇지 그 새가 한 번 날개를 치고 날개 되면 그 위상이 하늘을 찌르고 한 번 울게 되면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할 것이네.”
말을 마친 후 위왕은 칼을 뽑아 북을 비롯한 악기들을 내리쳐 부숴버렸다. 이윽고 주색을 끊고 엄숙하게 정사를 살펴 직분이행에 나선 위왕으로 말미암아 제나라의 국력은 날로 강대해져 갔다.
제 새끼 남의 둥지에 맡기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의 호(好)시절인 봄이 간다고 하염없이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도 예사롭지 않은 요즘이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다변(多辯)엔 진실이라는 알맹이가 드물다. 한 번 울음으로 천하를 깨우는 인재가, 운송(雲松), 향백(香柏)의 향기 지닌 큰 나무 닮은 듬직한 인걸(人傑)이 그립다. 나무의 울창한 가지에 사로잡혀 종일 노래를 부르는 새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건만 선거철 유언비어처럼 떠도는 말, 말들의 난무에 골머리가 지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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