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50
구화지문(口禍之門)
김현임(수필가)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난다. 사건 후 지금까지 곳곳에서 터지는 숱한 말, 말들 때문이다.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믿어야할지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도 없다. 동요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있다는 차, 인생은 끝까지 배우다가 간다던가. 홍차라는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차를 터득해 가는 중이다.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관심은 물론이요, 눈길조차도 주지 않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천명 입구에 이르도록 마신 적이 없는 홍차, 그러니까 홍차는 이름처럼 붉은 빛깔의 차려니 지레짐작했을 뿐이었다.
첫 대면 후 조심스럽게 친분을 쌓아가는 관계랄까. 요즘 들어 그 홍차 맛을 천천히 알아가는 중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어떤 이의 잔잔하고 차분한 음성처럼 비가 내리던 엊그제 아침나절이던가.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니셨던 타샤 투더 할머니의 ‘고요한 물교(敎)’ 신봉자들이 모일 것 같은 이 봄날의 우일(雨日)엔 따끈한 홍차가 제격일 것이라고.
‘늦은 밤 침상에 들어가기 전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한 잔의 홍차. 그 차가 전해주는 소박하고 다정한 행복’. 이는 홍차의 모든 것을 알려 주겠다 표방하는 책자의 첫 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눈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붉은 색과 입 안 가득 퍼지는 향기로 우리에게 건강과 힐링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최고의 음료가 홍차란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말수 적은 사람처럼 고즈넉이 내리고. 양초 불빛을 받아 더더욱 고혹적인 빛깔을 띤 투명 유리 다구 주전자, 그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까지. 그 모습이 너무 고요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면서 떠올린 시다.
침묵의 구조는 단순하다
배경이든, 주인이든
맡은 바 정물로 앉아 버티는 것이다.
구르거나 되바라지지 말고
순정히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
그러니까 내면의 화법은
지퍼로 입성을 견고히 채우는 것
재갈을 물리는 일이다.
이영식 시인의 ‘침묵의 재구성’이라는 시를 읊조리며 평범한 찻잎이 긴 고통의 과정을 거쳐 우아한 차로 변신하게 되는, 홍차 제조의 의미를 곱씹는다. 녹차와 홍차의 원재료가 같다는 데서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제다법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는다. 그러니까 찻잎의 산화 발효도에 따라 녹차, 청차, 황차. 홍차라는 다명(茶名)을 얻는다. 일부러 시들게 한 찻잎을 비벼 상처 내는 과정인 유념을 거치는 동안 꽃향, 과일향, 풀향, 낙엽향에 훈연(熏煙)향 등등의, 특유의 향기를 지니게 되는 것이 발효차인 홍차다. 콧속을 가로지르는 것 같은 상쾌한 느낌에다 금황색을 띤 적갈색의 맑고 투명한 색감이 특징이라는 홍차의 이력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덧 참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생각했다. 우리도 홍차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숱한 시련, 그 상처들로 하여 보다 깊은 맛을 지닌 사람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는.
때마침 세계적 홍차 산지인 인도에서 며칠 후면 총선이 치러진다. 그런데 구도의 판세가 ‘왕자와 거지의 대결’이란다. 홍차 티백에 뜨거운 우유를 부어주는 인도 특유의 길거리 홍차를 ‘차이’라고 하는데 인도의 케네기 가(家)인 네루 간디 집안의 라훌 간디와 겨루는 정적(政敵) 모디 웨이브가 천출(賤出)인 차이 행상(行商) 신분이었던 까닭이다. 정식 주전자나 티 포트 대신 냄비에 물과 우유, 찻잎을 한꺼번에 넣고 끓여낸다는 차이. 진하게 끓여낸 차이의 달콤하고 농후한 맛이 피로에 지친 서민들의 심신을 달래주었듯 지금 인도에서는 서민들의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져줄 차이 왈라(茶商) 모디를 향한 지지 열풍이 드세단다.
세월호 사건을 겪은 후 절감한 것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처럼 홍차에도 엄격한 등급이 있었다. 이른바 차의 신분증이다. 40에서 50% 수분을 증발시키고 유념의 과정을 거쳐 산화발효를 시키는 과정까지 어느 곳의, 어떤 잎을, 어느 정도 숙성시켰는가에 따른 홍차 감별법이다. 깊고 우아한 향으로 홍옥(紅玉), 일명 루비라는 보석이름을 획득한 게 대만의 일월담 홍차다. 루비는 뜻밖의 지진으로 차밭이 망가진 후 긴 실패 끝에 길러낸 귀한 차나무에서 비로소 재탄생된 최상의 홍차로 깊은 품격과 맛을 자랑한다는 것도, 홍차의 엑기스가 다량으로 함유된 마지막 한 방울을 ‘베스트 드롭’이라 부른다는 것도 내겐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흰 찻잔에 담긴 붉은 차는 장엄한 노을의 빛깔일까. 아니 나는 이왕이면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이라 믿고 싶다. 붉을 홍(紅)자는 실 사(絲)에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뜻하는 공(工)자가 조합되었다. 나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저만치 밀쳐두었던 홍차, 그 한 잔의 홍차를 마시면서 다시 되새겨 본다. 내가, 우리가 이토록 서로의 슬픔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곤 짐작도 못했다. 결국 우리는 한 몸이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로 너나없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더 이상 떠드는 건 상처를 덧낸다. 구화지문(口禍之門),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라고 했으니 더 이상 서로를 탓하지 말고 이제 침묵하며, 대신에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수습의 수순을 밟자. 단단한 실로 헤진 상처를 단단히 꿰매야 한다. 가녀린 차 이파리에 가한 숱한 부대낌, 그 상처가 더없이 향기로운 차를 탄생시키듯 이 시련들이 더더욱 우리를 단단하게 성숙시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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