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13)
낡은 집 서까래엔 이끼가 꼈고(2)
황상의 삶 자체가 고고였다. 이백은 「古風고풍」제59수9(五十九首9)에서 이런 말을 했다. 차차실권객(嗟嗟失權客) 근문하소규(勤門何所規). 풀이하면, 슬프도다 권력을 잃은 나그네여, 조심스레 묻노니 그대가 지키려는 무엇인가.
황상의 마음과 이백의 마음이 똑 같다는 것을 고풍이란 시에서 증명하듯이 황상 역시 이백처럼 살고 싶었던 것은, 이미 스승 다산이 일러준 <제황상유인첩> 마지막 대목에 선명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부르는 조서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도 웃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구이(九二)의 길함이다’란 말. 그래서 황상은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탐할 필요도 없었으며 탐한들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십일은 가지 못한다는 말.
황상은 스승 다산으로부터도 그 같은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경험한 터였다. 영조대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가까이 모실 수도 있었지만 영조대왕이 승하한 후 스승 다산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이 되어 죽음의 목전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귀양살이를 18년 동안 하질 않았던가.
권불십년(權不十年).
어떤 권력도 십년을 가지 못하기에 십년 세도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속담까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허무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고고의 풍격은 헛되고 속된 세상과는 달리 기인(畸人)의 세계이다. 기인은 신선(神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인은 땅에서 살지만 하늘과 그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장자(莊子)는 제물편(齊物篇)에서 ‘막고야의 산에 신인(神人)이 살고 있는데, 그 살갗은 마치 빙설(氷雪) 같고 곱기가 처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키며 이슬을 마시고 살고, 구름 기운을 타고 나는 용을 몰아 세계 바깥을 노닌다’라고 노래했다.
열선전(列仙傳)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후한(後漢) 때의 일로 위백양(魏伯陽)이란 사람은 제자 세 사람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 가 선약을 만들었다. 선약이 다 만들어지자 위백양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약을 먼저 개에게 먹여보아서 개가 나는 걸 보고나서야 사람이 먹어도 된다”며 선약을 개에게 먹였다. 그랬더니 개가 그만 즉사해 버렸다. 백양이 그 약을 먹었는데, 역시 입에 들어가자마자 죽어버렸다. 이에 제자 한 사람이 따라 먹었는데, 역시 죽어버렸다. 이를 본 나머지 두 제자는 놀란 나머지 그 약을 먹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렸다. 두 제자가 사라지자 죽었던 백양이 일어나 그 선약을 죽어버린 두 제자와 게에게 먹였다. 그랬더니 모두 일어나 드디어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 산을 내려간 두 제자는 비로소 그 모습을 보고 약을 먹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고고는 황상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세계였다. 그러므로 열선전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황상의 마음이기도 했던 것이다.
시품의 여섯 번째 풍격은 법도에 맞고 아담한 전아(典雅)이다.
시품의 저자는 가장 문학적 표현과 함께 녹음 아래서 금(琴)을 베개처럼 눕고 지낸 ‘면금녹음(面琴綠陰)’의 구절을 통해 전아의 뜻을 잘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전아 역시 황상이 그리워하는 세계와 딱 떨어져 맞는다. 전아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으로는 천재시인 이백과 같은 해에 태어난 왕유인데, 그는 이백과 두보에 다음 가는 대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시불(詩佛)이라는 별호가 있는 왕유는, 도원의 노래에서 마지막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바깥세상 버리고 밭과 정원을 일으켰네 還從物外起田園’
그 역시 은둔과 은일(隱逸)의 시인이었기에 도연명처럼 전원생활을 사랑하고 홀로 숨어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비 개고 난 산에는 空山新雨後
나날이 짙어가는 가을빛 天氣晩來秋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明月松間照
맑은 물은 돌 위로 흘러가네 淸泉石上流
<산기슭 가을 저녁>의 일부인 이 대목만 보아도 황상이 그리워하는 세계, 황상이 추구했던 유인의 삶과 같았다.
시품의 일곱 번째 풍격은 단련되고 정제되는 세련(洗鍊)이다.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을 뿐 아니라 능숙하고 미끈하게 갈고닦음을 뜻하는 세련은, 시인이 시어를 선택함에 있어 더 보태져도 안 되고 더 빼서도 안 되는 단련과 정제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시인은 누구든지 글자 하나를 놓고 노심초사를 할 수밖에 없다. 갈고 닦는다는 것은 시어 하나를 찾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수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성(詩聖) 두보조차도 ‘내 고질병은 아름다운 시구를 탐하는 것(爲人性癖耽佳句위인성벽탐가구)’이라고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시인은 누구나 최고의 시어, 최고의 어휘를 통해 아름답고 산뜻하고 치밀하고 섬세한 세련의 명시(名詩)를 낳고 싶어한다.
시품의 여덟 번째 풍격은 굳세고 힘찬 경건(勁健)이다. 시가 튼튼하고 힘차서 기운이 솟는 것이 경건이다. 이 같은 시는 한유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맹자 이후 유학의 도통을 잇는다고 자부한 인물로 시에서는 현실에 대해 직접 발언하였고 서사적 제재로 장대한 시편을 지었다. 또한 인생과 자연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을 남겼다. 한유를 일컬어 사공도는, 한유의 시는 기세를 몰아가는 것이 마치 우레가 번쩍이고 번개가 쳐서 하늘과 땅 사이를 갈라놓고 지탱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한유의 시는 대단히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증정병조(贈鄭兵曹)’와 같은 시도 남겼다.
동이 술 마시며 십 년 전 서로 만났을 때
樽酒相達十載前
그대는 장년이요 나는 소년이더니
君爲壯夫我少年
동이 술 마시며 십 년 뒤 다시 만나니
樽酒相達十載後
나는 장년이요 그대는 백발이구려
我爲壯夫君自首
한유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삶을 관망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 대표적인 시로 ‘과홍구(過鴻溝)’이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혈투를 벌이다가 오랜 전쟁을 준지하고 서쪽은 하나라,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삼기로 한 기준점이 홍구이다. 그러나 유방의 군사(軍師) 장량과 진평은 양호유환(養虎遺患)의 국면인즉 초가 어려울 때 쳐야한다고 주장해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만들어 결국 초나라를 망하게 하고 만다. 한유는 이를 두고 시를 지었으니,
용과 범이 지쳐 강 언덕을 분할하니
龍疲虎因割川原
억만창생은 겨우 목숨 붙었네
億萬蒼生性命存
누가 군왕에게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했나
誰權君王回馬首
진정 한 번 던져 천하를 놓고 도박하였지
眞成一擲賭乾坤
짧은 편폭에 용이 꿈틀대고 범이 드러누운 태도를 드러냈다(短幅中有龍跳虎臥之觀 )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꿩사냥의 시도 젊어서 쓴 한유는, 억센 기상과 끝까지 넘치는 시를 많이 썼던 것이다. 그는 「이익에게 답하는 편지(答李翊書」에서 “인의를 갖춘 사람은 그 문장이 매끄럽고 부드럽습니다(仁義之人 其言藹如也)하고 하여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유가의 도인 인의(仁義)를 내면적 수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유는 또 “문장의 기세와 문사도 기세가 성하면 장단(長短)과 성운(聲韻)의 고저(高低)가 모두 적절하게 된다”며 문기설(文氣說)을 주장했다.
시풍의 아홉 번째 풍격은 표현력이 다양하고 화려한 기려(綺麗)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일컫는 것이 기려로써 곱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기려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정신에 진정한 부귀가 담겨야만
神存富貴
비로소 황금을 가벼이 여기는 법
始輕黃金
짙음이 다하면 반드시 메마르나
濃盡必枯
담박한 것은 자주 깊어가네
淡者屢深
이슬 내린 뒤여서 산은 더 푸르고
露餘山靑
분홍 살구꽃은 숲을 이루네
紅杏在林
화려한 집에 달빛이 훤히 비추니
明月華屋
녹음 아래 그려진 다리 놓여 있네
畵矯碧陰
황금 술동이에 술이 가득 넘치니
金尊酒滿
초청한 손님 위해 거문고를 연주하네
伴客彈琴
취해서 스스로 만족함 느끼니
取之自足
아름다운 회포를 다 표현할 수 있구나
良殫美襟
기려는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지닌 시작품을 평가하므로 황상의 정서와는 딴판일 수밖에 없다. 물질과 정신이 모두 풍족해야만 된다는 이 시는 황상과는 다른 세계였다. 물질적 부귀를 추구하면서 이에 못지않게 정신적 부귀에도 비중을 둔 기려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시품의 하나였다.
시풍의 열 번 째 풍격은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自然)이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그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己矣哉自然生來人將自然自然老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自然歌)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람이 순응한다는 내용이다.
자연스러운 창작을 한 작가는 이백과 도연명, 그리고 왕유와 맹호연 등이 있으니 자연을 싫어하고 자연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시풍의 열한번째 풍격은 함축(含蓄)이다. 함축은 곱씹어볼수록
깊은 맛이 나고 여운을 남긴다.
「시품」에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고 풍류를 모조리 표현한다”며 함축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곧 함축의 정수이기도 하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이나 그 속에서는 만 가지의 정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는 표면적인 내용 말고도 그 이면에 또 다른 내용이 숨겨져 있다. 독자는 함축의 시를 읽을 때 그 깊은 뜻을 음미하며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시풍의 열두번째 풍격은 의기가 강한 호방(豪放)이다. 의기가 강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호방이다. 웅대한 포부와 광활한 시야를 보는 것이 호방함이다. 고려 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라고 노래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호방이 없고서는 할 수가 없다.
호방한 시를 쓴 사람은 아무래도 이백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호방한 풍격의 시를 많이 썼는데, 「꿈속에 천모산을 노닐고 시를 남겨두다夢遊天姥금留別 몽유천노금유별」「촉도난蜀道難」 등 많은 작품 속에서 호방함을 보였다. 송강 정철은 평호당이수(平湖堂二首)에서,
우주에 남은 쇠잔한 인생이여
宇宙殘生在
강호에 백발만 많구나
江湖白髮多
밝은 때라 통곡도 못하고
明時後痛哭
취한 후에 길게 노래나 하노라
醉後一長歌
먼 산자락 자주 개었다 흐렸다 하니
遠岫頻晴雨
어촌이 잠깐 있었다 없었다 하네
漁村乍有無
외로운 배에 한조각 달만이 만리의 평호를 비추네
孤丹一片月
하고 노래했다.
열세번째 풍격은 마음의 진의를 말하는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생기가 한껏 도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정신의 미학을 잘 나타냄으로써 작품은 더욱 살아날 수 있다.
채근담(菜根譚)에서는,
“행복이란 마음대로 구하지 못하나니 스스로 즐거운 정신을 길러 복을 부르는 바탕을 삼을 따름이요, 재앙 또한 마음대로 피하지 못하나니 남을 헤치는 마음을 없이 함으로써 재앙을 멀리 하는 방도로 삼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채근담의 말처럼 시를 짓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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