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9
김현임(수필가)
차청차규(借廳借閨)
시어머니를 향해 코맹맹이 애교를 떤다. 어머니, 어머니 눈웃음 살살 흘리며 곰살맞게 구는 며느리는 얄미운 손아래 시누이의 도시락 요청에 눈에 띄지 않게 골탕을 먹이는 못 된 올케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집안 살림살이를 도맡은 안사람의 신분이 그녀가 아닌 그라는 것이다. 둘의 직업이 의사와 사진작가였던가. 불과 1년 전 쯤 유명 작가의 주말극에 등장한 동성커플의 안타까운 사랑행각을 두고 벌어진 시청자들의 설왕설래가 격세지감마저 든다.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최근 충무로의 이름 난 영화감독이 그의 오랜 동성(同性) 애인과 결혼식을 거행했으니 말이다. 꽤 조심스럽게 다뤄졌던 예전 커플들과는 달리 일일연속극 속 걸걸한 목소리의 아내는 앞치마를 두룬 채 두 손으로 머리 싸매며 남편의 반찬걱정, 퇴근해 들어서는 짝을 향해 뜨거운 입맞춤으로 까발린 애정표현도 마다않는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설정을 두고 전처럼 뜨거운 논란이 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여성의원이 의회에서 13시간 가까이 마라톤 연설을 감행했다. 웬디 데이비스라는 텍사스 주 상원의원은 낙태를 제한하는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휴식 시간도 반납했다. 자신의 출신이 미혼모의 자녀이기에 원치 않는 출산으로 빚어진 사회적 불행을 누구보다 열렬히 호소했다던가. 그녀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그대로 생중계되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생명존중에 반하는 낙태허가도 그렇고 전통적인 결혼의 가치를 훼손했다며 반발하는 기독교의 반발이 가로막는 미국 대법의 ‘동성결혼 보호법’도 개인의 자유 의지를 최우선하는 시류의 도도한 물결을 어찌 막을 것인가. 아직은 동성의 결혼에 여성커플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이지만 자신의 몸속에 둥지 튼 생명체의 존폐 여부를 두고, 아슬아슬 치닫는 치마 길이를 두고 구태여 여자들이 반기를 휘두를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작가라는 뜻의 영어 ‘라이터’라는 낱말을 보면 오직 남성 형만 있을 뿐 여성 형이 없다. 글을 쓰는 일은 으레 남성이 하는 직업이지 여성이 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여성이 이런 직업을 가질 때에는 그 말 앞에 필연적으로 ‘여류’라는 관이 얹는다.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유표화(有表化)라고 부른다. 전문직에 속하는 어느 직업치고 ‘여성’이니 ‘여류’니 유표화 되지 않은 직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는 이디스 워튼이라는 미국의 여성작가를 소개하는 글의 서두다. 감당할 돈만 넉넉하면 갑남을녀의 우주여행이 코앞인 이 시대에도 불문율 아니던가. 여전히 작가라는 지칭 앞에 접두어처럼 붙은 ‘여류’는 마치 씹다 붙여둔 껌 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다. 평소 점잔하기로 유명한 ‘주홍글씨’의 너새니얼 호손은 당시 주목 받는 여성작가들에 비해 위축된 자신의 처지를 빗대 ‘이제 미국 문단은 빌어먹을 여편네들 등쌀에 휘둘리고 있다’ 투덜거렸다던가. 또한 ‘현자(賢者)의 머리에 소년의 마음을 지닌 채 죽을 때까지 젊은이로 산 사람’이라는 마크 트웨인조차도 ‘여성의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 ‘여자와 결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계집애들은 모두 똑 같애. 어차피 약속을 지키지 않거든’ 등등.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내놓고 여성폄하의 발언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디스 워튼의 작품들은 당당히 고전의 반열에 오른다. 미국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이선 프롬’과 '여름’이다. 하지만 여자, 그것도 양갓집 규수가 글이라는 고차원의 중노동을 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시대에 이디스 워튼은 강안여자(强顔女子), 그러니까 수치심을 모르는 여자라는 질시의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의 가는 팔목이 어찌 당대의 엄격한 규범과 질서의 담을 무너뜨릴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맘껏 부를 누리는 상류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 그러니 바깥의 이런저런 동정(動靜)에도, 생계유지라는 구차한 명분에서도 큰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침대에 앉아 글을 써 꽃잎처럼 방바닥에 흩뿌리면 바닥에 대기해 있던 비서가 그것을 주워 모았다던가.
이디스 워튼 같은 선각자들의 용감한 발걸음으로 나날이 신분상승에 기세등등해진 현대여성들, 최근엔 상대적으로 남자 쪽에서 외려 역차별을 받는다는 아우성이 심심찮다. 그러니 빈계지신(牝鷄之晨),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구어(舊語)는 흔들거려 아무 쓸모가 없는 썩은 이로 전락했다. 실로 변화무쌍한 시대, 때로 감당 못할 낯 선 풍조가 해일처럼 밀려들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자성어다. 마루 빌려주니 어느새 안방 차지하고 앉았다는 뜻의 ‘차청차규(借廳借閨)’다. 슬금슬금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마루 끝에 앉아 있던 나그네가 아니던가. 깜냥 껏 엉덩이를 살짝 살짝 디밀던, 그 모습이가 안쓰러워 주인이 베푼 작은 친절이었을 것이다. 그를 빌미로 마루라는 첫 공간에서만큼은 제법 당당한 활보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한 식솔인양 설친다. 나름대로 위치확보를 해낸 것이다.
“가라고 가랑비 오네요”
하는 주인의 말을
“있으라고 이슬비 오요”
뻔뻔히 되받아치는 우스개 속 나그네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가슴을 뜨악하게 하며 낯 선 괴물의 등장인양 요란하게 다가왔던 새로운 조류는 유행에 민감한 안방마님의 마음을 언제 사로잡았을까. ‘차청차규(借廳借閨)’, 툇마루 넘어 안방을 차지했다. 고지식한 지아비를 시대 뒤떨어져 캐캐 묵은 냄새 난다 아예 대문 밖으로 몰아낸 격, 충격으로 무디어진 우리의 의식에 영합해 당연한 풍조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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